이사야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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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의 저작 문제 ===
====저자====
"이사야서를 누가 기록했는가?"에 대하여는 [[기원전 8세기]] 어간에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의 저작이라는 입장이 역사-비평적 신학이 발흥하기 전까지 전체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유럽에 불어닥친 계몽사상의 여파로 성서를 고문헌으로 이해하는 비평적 성서읽기가 생각되면서, 이사야 외에 제2 이사야 및 제3 이사야라는 학설이 즉, 이사야 예언서의 저자를 복수로 보는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다. [[1775년]] [[되덜라인]](J. C. DoederleinDöderlein)은 그의 "이사야"란 (''Esaias'') 저작에서 이사야서는 두 개의 다른 작품들의 합성이라 주장하고, [[아이히혼]](J. G. Eichhorn)은 "구약 서론"이란 책에서(Eichhorn, 1780-1783) 사 40-66장은 이사야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사야서에 대한 비평적 가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버나드베른하르트 둠]](B.Bernhard Duhm)의 이사야서 주석(Das Buch Jesaja, 1872)이었다. 둠에 의하면, 이사야서는 원-이사야서 (Proto-Isaiah), 제2 이사야서 (40-55장), 제3 이사야서 (56-66장) 등으로 구분되는데, 소위 제2 이사야서는 [[기원전 538년]] [[바벨론]]에 거주하던 추방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어떤 무명의 예언자에 의해 기록되었고, 소위 제3 이사야서는 추방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후에 어떤 무명의 또 다른 예언자가 기록한 책이며, 소위 원-이사야서는 [[기원전 2세기]] [[마카비]] 시대까지도 계속 진화 중에 있던 가장 늦게 산출된 문헌이라 한다.
====버나드베른하르트 둠====
[[버나드베른하르트 둠]]의 삼구분설 비평 가설이 비평학계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분은 어휘 상의 차이, 문체상의 차이, 신학 사상의 차이 등에 근거한다고 한다. 특히 소위 제2 이사야서에는 심판 이후의 회복 주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또한 소위 제3 이사야서에서도 회복 주제가 부각되지만, 기소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심판 메시지도 등장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회복의 메시지는 둠이 원-이사야서라 부른 1-39장에서도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메시지에서 (사 13-14장) 추방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사 14:1 이하).
[[File:Isaiah scroll.PNG|thumb]]
 
이사야서 후반부를 추방 이후의 저작이라 가정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고레스]]"라는 페르시아 대왕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사 44:28, 45:1 등). 그래서 이사야 후반부는 고레스라는 역사적 인물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여 이름을 떨치던 시기에 기록되었으리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고레스"라는 왕의 이름은 예언으로 알려졌을 수 있으며 ("요시야"란 이름이 왕상 13:2에서 태어나기 약 300년 전에 예언으로 선포되는 점을 참조), 이사야 후반부의 회복 메시지도 예수나 사도들이 가졌던 입장처럼 (마 3:3, 4:14, 8:17, 행 8:30 등),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라고 확신한다.
 
[[버나드베른하르트 둠]]을 필두로 하는 비평가설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도전은 "현재 우리가 지닌 구약 선지서들 중에서 무명의 저작은 전무한데, 유독 이사야같이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예언서를 어떤 무명의 선지자가 기록했겠는가?"하는 점이다. 더구나 "이사야 후반부의 회복을 이미 체험한 어떤 이가 그 메시지를 기록했다면, 그것은 예언을 가장한 가짜 예언인데(vaticinia ex eventu), 그런 거짓된 것을 성경의 일부로 용납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도 설명해야 한다.
 
== 이사야의 시대 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