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토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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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3-7-2}}
=== 티토주의의 성립배경 ===
[[1948년]] [[6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코민포름]] 대회는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코민포름에서 제명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원인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이끌던 [[소련]]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그 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옛 [[공산국가]]들과의 [[정치]]적·[[경제]]적 교류가 중단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모든 면에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모든 원조와 교류의 중단은 엄청난 타격이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교류를 서방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유고슬라비아는 독자적 공산주의, 적극적 [[중립주의]], 비동맹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다.
 
=== 티토주의의 실행 ===
[[1950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노동자 자주관리에 중점을 둔 신경제정책이 실시되었고, 이를 위해 경제조직이 개편되었다. [[1952년]] 1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 당의 명칭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변경되었고, [[1953년]] 1월에는 새로운 [[헌법]]이 공표되어 자주관리체제가 본격화되었다. [[이오시트 스탈린|스탈린]] 사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나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많은 견해 차가 있었다.
[[1958년]] [[4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제7차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새로운 강령은 유고슬라비아의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인데, 코민포름에 의해 수정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그 후에도 꾸준히 독자노선을 견지하였다. [[1961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제1차 비동맹국회의를 개최하였으며, [[1963년]] [[4월]]에는 독자노선을 굳히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바꾸었다. [[1964년]] 제7차 전당대회를 통해 티토를 서기장에 재선시키고, 경제자유화와 당조직의 민주화·자유화 등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 평가 ==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엄격하고 경직된 관료조직 중심의 [[스탈린]]식 공산주의 체제를 거부한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 공산주의 노선은 [[서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여론]]으로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노동자 자주경영===
또한 티토의 노동자 자주관리 이론은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시키는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산 경험에 근거한 [[지혜]]로써 직접 회사를 꾸리고, 회사의 살림살이에 참여하는 [[민주]]적 경영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한국에서는 부도난 경동산업을 인수하여 노동자 자주 경영으로써 연매출 20억원에 달하는 우량기업으로 되살린 [[인천]] [[키친아트]]<ref>《키친아트 이야기》/청림{{쪽}}</ref>,대구 달구벌 교통,청주 우진교통이 노동자 자주경영을 하고 있다.[[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자]]들이 무능한 경영진을 [[법원]] 점유권 실행 허가로 퇴출시키고 스스로 경영하는 회사가 백여개에 달한다.<ref>《진보집권플랜》/조국,오연호/오마이북{{쪽}}</ref>이와 비슷한 경영방식으로는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경영이 있는데 이미 [[사회민주주의]] 나라들과 [[폴크스바겐]]에서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