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발수기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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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년]] 5월 독발수기능은 양주(涼州)를 침공하여 청산(오늘날의 감숙성 배현)에서 양주자사 [[견홍]]과 맞선다. 양주에 있던 다른 선비족들이 호응하여 견홍은 고립되고 결국 패하여 사망한다. 이후 진에서는 실권자였던 [[가충]]이 토벌대장으로 추대되지만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정벌을 미루다 [[가남풍|딸]]의 혼인을 이유로 눌러앉는다.
 
[[272년]] 양주자사로 파견된 [[양흔]](楊欣)은 돈황에서 영호풍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고, 독발수기능의 세력이 강대해지기도 해서 직접 맞서지 않고 강족들과 화친한다. 새로 사령관으로 부임한 [[사마준]] 역시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키우는데 열중한다. 독발수기능은 주변의 이민족들을 포섭하고 연맹을 통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4년간의 평화기동안 독발수기능의 세력은 20여만으로 늘어났다. [[274년]] 10월 사마준은 양주 금성군을 침공한 걸문니(乞文泥)의 부대를 격퇴하고 여세를 몰아 독발수기능의 본대를 공격하여 삼천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힌다. 결국 독발수기능은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고 휴전을 맺는다. 사마준은 독발수기능과 휴전을 맺는 한편으로 그의 연맹을 해체시키기 위해 다른 연맹의 일원들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간다. [[275년]] 6월 선비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276년]]에는 아라다(阿羅多)가 이끄는 선비족을 패퇴시키고 사천을 죽이고 9천명의 포로를 사로잡는다. 독발수기능은 후탄발(侯彈勃)과 함께 서진의 둔전을 파괴하기 위해 침공하지만 사마준은 [[277년]] 평로호군 [[문앙]](文鴦)의 지휘 하에 양주, 진주, 옹주의 군사를 모아 대규모의 전진배치를 행한다. 선비족 연맹은 와해되고 길가라(吉軻羅), 후금다(侯金多), 열경(熱冏)등의 선비족 20만여명이 서진에 항복하게 된다.하는항복하는 피해를 입고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278년]] 양흔은 독발수기능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강족과의 화친을 끊는데 독발수기능의 세력이었던 강족 약라발능(若羅拔能)이 양주를 침공해 무위에서 양흔을 패퇴시키고 전사시킨다. 이후 서진이 다시 서북방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틈을 타서 [[279년]] 1월 양주를 침공해 금산(오늘날의 감숙성 산단현)에서 후임 양주자사 [[소유 (서진)|소유]]의 군사를 격멸시키고 양주를 점령한다. 서진군 총수의 1/3에 달하는 양주 방위군 전원이 채 만이 안되는 독발수기능의 군사에게 패하여 전투불능이 되었다. 양주는 위나라 시기부터 여러 이민족들과 촉한의 위협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지역이지만 함락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서진에서는 [[279년]] 12월 무위태수(武威太守)로 있던 서진의 장수 [[마륭]]에게 3000의 병사를 주어 토벌하도록 명했는데 마륭은 수레를 만들어 [[제갈량]]의 팔진도를 펼쳐 독발수기능의 수만 군사를 패퇴시켰다. [[280년]] 독발수기능은 부하에게 피살당했고, 사촌동생 [[독발무환]]이 그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