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침례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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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특수 침례교회들은 1644년에 처음으로 신앙고백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교회들은 신앙고백 표지 서두에 "A CONFESSION OF FAITH of seven congregations or churches of Christ in London, which are commonly, but unjustly, called Anabaptists.." ("재침례파로 널리, 그러나 잘못되게 일컫는 일곱 교회들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라고 밝혔는데, 유아가 아닌 믿는 자에게 세례를 베푼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시행했기 때문에 재침례파로 여겨진 오해와 알미니우스 구원관을 가진 일반 침례교회와 구별하지 못했던 일반인들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다. <ref> B.S. Poh, A Garden Enclosed: A historical study and evaluation of the form of church government practiced by the Particular Baptists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Good News Enterprise, 2013, p.4.</ref> 침례파 청교도들의 첫 신앙고백은 발표된 곳의 지명에 의해 "런던신앙고백”(1644)이라고 부른다. 이 신앙고백은 유럽대륙의 제네바 운동과 개혁파 신앙을 계승하고 있음을 공표(公表)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ref> 조엘비키, 칼빈주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 지평서원, p.75.</ref>
 
 
이 신앙고백을 통해 침례파 청교도들은 재침례파나 정통성과 교리적인 부분에서 오해를 없애고 개혁파 교회 대열에 당당히 합류하여 다른 청교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카톨릭과 성공회가 번갈아 획득한 국가 권력이 오랜 기간 동안 청교도들을 탄압한 시기에는 장로파나 독립파 청교도들에 비해 교세가 열세였기에 더 많은 박해와 반대를 받았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탁월한 신학 지식의 역량이 있었으나,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교세에 힘이 있었던 다른 청교도들과 달리 신학 논문과 저술을 남길 여유가 없었고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오직 교회 자립과 생존을 위해 분투하면서 교회 세우는 목회적 역량에만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이것은 정부의 핍박이 거의 사라진 후, 정치에 깊게 발을 담궜던 장로파와 독립파 청교도들이 정치적으로 축출되어 그 교회들의 교세가 크게 위축된 시기에도 오히려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특수 침례교회들은 영국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결집된 단결력과 지역 교회 간의 연합을 보여 주었고, 성경과 교리에 관한 건전성과 실천에 있어서 순수함을 드러내었기에 영국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받아 영국 각 지역으로 퍼져갔다. 이렇게 침례파 청교도들은 초기부터 핍박시기를 거쳐 뿌리를 내리고 꾸준하게 성장하여 지금도 잉글랜드의 주류 비국교회권 교회로 남고 있다.
 
== 두 번째 신앙고백(1677/16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