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 스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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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 스타인''' 경({{lang|en|Sir Marc Aurel Stein}}, [[:en:Order of the Indian Empire|KCIE]], [[1862년]] [[11월 26일]]~[[1943년]] [[10월 26일]])은 [[헝가리]]에서 태어난 [[영국]]의 [[탐험|탐험가]]이다.
 
그는 영국과 인도 정부의 지원으로 [[중앙아시아]]를 세 번 탐사하여 많은 유물을 발굴했으며, 중국 [[간쑤 성]] [[둔황 시|둔황]]의 [[막고굴]] 제17굴 장경동의 유물를 연구해 이를 유럽의 학계에 알려 '[[돈황학]](敦煌學)'을 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
[[파일:Aurél Stein.jpg|thumb|[[두라 에우로포스]]에서의 아우렐 스타인(1929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영국에 귀화하였다. 독일과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이란학과 인도학을 전공하고, [[1888년]] 인도 [[라호르]] 동양 학교(Oriental College, Lahore) 교장이 되었다.
 
그는 인도 정청(政廳) 고고학 조사부에 근무했는데, [[1900년]]~[[1901년]] 동 조사부의 파견으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지역]] 각지를 탐험하고, 2번째 탐험 때에는 중국 둔황에서 많은 고문서와 회화를 발견하였다. 3번째 탐험 때는 하라 호토(Khara-Khoto) 폐허와 [[투루판 분지]]에 있는 옛 무덤을 발견하였다. 많은 미술품과 고고학적인 유물 자료를 발견하여, 이것의 상세한 보고서 및 연구 저서로 중앙아시아 연구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또, 서역을 휩쓴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유적도 발견하였다. 저서로 《동남 이란의 고고학적 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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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의 유출 ===
[[파일:Pelliot.jpg|thumb|장경동의 문서를 조사하는 폴 펠리오]]
[[1908년]] 프랑스의 중국학자 [[폴 펠리오]]도 비슷한 금액을 지불하고, 아우렐 스타인이 가져갔던 분량만큼의 유물을 프랑스로 보내게 된다. 이후 일본의 승려 [[오타니 고즈이]]도 5,000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미국인 [[랭던 위너]]{{출처|날짜=2014-2-8}} 등도 막고굴의 유물을 모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폴 펠리오가 가져갔던 유물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이 있었다. 오타니가 일본으로 유출한 유물 중에는 일부가 완전히 유출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어, 현재는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307호)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에 이런 대량의 유물 유출을 두고 중국은 '유물 도둑'이라며 분개하지만, 중국은 당시 왕위안루가 유물 보존을 위해 400킬로미터를 여행하며 지역의 관리들과 교섭·담판을 하며 다녔던 노력과 [[문화 대혁명]] 당시 둔황의 상당수 유물들이 [[홍위병]]들에게 파손되었던 역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현재도 중국 측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은 유물을 반환하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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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 http://idp.bl.uk/pages/collections_ch.a4d [http://idp.bl.uk/pages/collections_ch.a4d]
* http://www.tourzine.kr/e/7835 [http://www.tourzine.kr/e/7835] (오타니 컬렉션)
* [http://www.dailymotion.com/video/xeg3xd_paul-pelliot-et-le-tresor-national_travel Video Paul Pelli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