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문익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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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기 ===
어렸을 때부터 문학 실력이 뛰어났다. 이후 당시 명망있던 문신 겸 서예가, 학자인 [[이산해]]의 둘째 딸이자 [[이지함]]의 종손녀인 이씨와 결혼하였다. 뒤에 그는 가문을 따라 [[남인]]이 되었고, 장인 이산해와 처남 [[이경전 (조선)|이경전]](李慶全) 등은 [[북인]]이 되었지만 그가 이산해의 사위인 덕에 화를 모면했다. 실록에 의하면 그가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화패(禍敗)를 면할 수 있었다.<ref>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9월 5일(병진) 7번째기사 "제독 접반사 이덕형이 찰원에게 남쪽 왜적의 섬멸을 청할 일로 보고하다"</ref>'고 한다. 이때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전해진다.
 
=== 관료 생활 초반 ===
[[1580년]](선조 14년) 약관 20세 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전체 2위)로 급제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580_004032&choiceGanada=%EC%95%84&choiceOrderNum=2501|2600&classCode=MN&isEQ=true&kristalSearchArea=B 이덕형-과거 및 취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 이어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인 [[율곡 이이]]에게 발탁되어 [[홍문관]]정자(正字)가 되었다. 이때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하고 이덕형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고 한다. 과거 합격 동기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한 뒤 함께 옥당인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 뒤 이덕형은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修撰)과 교리(校理),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0년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1년]]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조선시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제학]]이 되었다. [[겐소]], [[다이라]] 등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출처|날짜=2008-7-10}}.
 
[[1591년]] [[8월]] 그의 처남 이경전이 [[사가독서]]에 선발되지 않았으므로 장인 이산해가 크게 노하였는데, 이때 장인 이산해의 부탁을 받고 다시 아뢰게 하여 이경전이 마침내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ref>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8월 10일(임인) 1번째기사 "간원이 독서당 간택을 다시 할 것을 청하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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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란 종결 이후 ===
[[1599년]](선조 32년) 윤 [[4월 9일]] 중국 명나라의 장수 유제독(劉提督) 휘하의 항왜가 독약을 잘 만들자, 이덕형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도감의 초료를 내서 항왜 사야여문(使也汝文) 등에게 주어 항왜를 꾀어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항왜가 [[황해도]] [[평산군]]에 이르러 달아나자 제독이 크게 노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끝까지 추적하여 잡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선전관]] [[이괄]]을 보내 계략으로 잡아 참수하게 하고 그 머리를 보내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투항한 항왜를 죽였다는 이유로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켰으나 겨우 무마되었다. [[1599년]] 겸문학(兼文學), 그해 [[12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으며, [[1600년]] [[1월]]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곧 [[도원수]]를 겸하였으며,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 [[1601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4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종결 후의 군대 정비 및 민심 수습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 중의 공신을 책봉할때 [[호성공신]], [[선무공신]]에 모두 추천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1608년 6월 진주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1609년 10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명나라에서 [[임해군]]의 존재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유로 들어 [[광해군]]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그는 스스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되돌아왔다. 1611년 8월 좌의정, 1612년 11월 영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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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 6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렸으며, 병을 얻어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 그의 일족인 [[이이첨]]이 대북의 영수였으나 그는 인목대비의 폐모와 영창대군의 사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병을 이유로 [[의정부]][[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모든 관직이 삭탈되었다. 1613년 10월 사저가 있던 당시의 [[경기도]] [[광주군 (경기도)|광주부]](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인조 즉위 후 복권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현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