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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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군'''(順和君, [[1580년]] ~ [[1607년]] [[음력 3월 18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이다. 아버지는 조선의 제14대 왕 [[조선 선조|선조]]이며 어머니는 [[순빈 김씨]]이다. 이름은 보(𤣰),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양사(兩司)로부터 거듭 탄핵당했다. 임진왜란 직후 도성이 함락되자 그는 [[임해군]] 진과 함께 각각 부대를 인솔, 순화군은 장인인 [[호군]] [[황혁]](黃赫), 처조부 [[황정욱]] 등과 함께 [[강원도]]를 거쳐 회령으로 갔으나, 순화군 일행을 알아본 국경인(鞠景仁)의 밀고로 [[카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후 장인 황혁, 처조부 황정욱과 함께 [[안변군]]의 토굴에 감금되었다가 [[카토 기요마사]]군의 본진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선조에게 항복 권유문을 쓰게 하라는 강요를 받고 항복권유문을 썼다. 그러나 처조부 황정욱은 비밀리에 항복 권유문은 진심이 아니라는 글을 써서 숨겨둔 뒤, 항복권유문을 쓰는 하인편에 딸려서 같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글을 써서 보냈다. [[1593년]](선조 26) [[9월 29일]] [[부산]]에서 이복형 [[임해군]], 장인 [[황혁]], 처조부 [[황정욱]] 등과 함께 조선군에 송환, 인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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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臨海君)이나 정원군(定遠君)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계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안치시켰는데, 이 때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직을 회복시켜 순화군(順和君)이라 하고, 익성군(益城君) 이향령(李享齡)의 아들 이봉경(李奉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 - 선조 209권,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3월 18일(신사) 3번째기사, 이보의 졸기 }}
 
사후 희민(僖敏)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생전 부인 장수황씨에게서는 자녀가 없고, 서녀만 2명이 있었으므로 사후 사촌 형인 [[익성군 (1566년)|익성군]]의 아들 진릉군 태경을 사후입양하였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