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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많은 관련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원래 열렬한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자였고 초기 사상의 뿌리는 [[표트르 크로포트킨|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사상과도 무관치 않았으나, [[1917년]] [[10월]]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고 나서부터는 [[5.4운동]] 전후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는 [[1918년]] [[11월]] 《신청년》에 발표한 <[[볼셰비즘]]의 승리> 등의 대표적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통해 "앞으로의 세계는 붉은 깃발의 세계가 될 것이다"고 공언하고 [[천두슈]]와 함께 《매주평론》을 창간,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일으켰다.
 
[[1921년]] 리다자오는 [[천두슈]]와 함께 중국에 공산당을 창립했는데 이때 비로소 비공식적이고 문단적인 성격의 [[볼셰비키]] 선동가에서 비로소 공식적인 중국 공산당 조직의 지도 계열 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이었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있었던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는 [[마오쩌둥]] 등도 참가하였다. [[천두슈]]와 리다자오의 지휘 아래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이 지도하는 [[코민테른]]과의 협력관계를 키워갔으며 [[1922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국민당]]과의 연계하게연계에 나서게 되고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어졌다. 리다자오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4년]] [[마오쩌둥]] 등 다른 공산당원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가기도 했고,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레닌]]의 원조로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이 사망한 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코민테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에서 [[4.12사건]]을 일으켜 코민테른 성원에 대한 숙청에 나서게 된다. 4.12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관련자들이 수배, 체포되었는데 리다자오도 이때 [[베이징]]에서 다른 동료 19명과 함께 감금되었고 [[소련]]을 [[대리]]해 [[중국 정부]]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죄로 [[4월 28일]] [[베이징]]을 관할하던 군벌 장쭤린의 명령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리다자오는 [[1917년]]부터 [[1927년]]까지 베이징 대학에서 [[도서관]]장, [[경제학]] 교수, [[역사학]] 교수 등을 지내면서 [[유물사관]], [[사회주의]][[역사]], [[사회주의]]와 [[사회운동]] 등 13개 과목을 담당하였다. [[볼셰비즘]] 혁명을 일으키고 [[한반도]]와 [[중국]]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공산주의자로 [[베이징 대학]]에는 [[1982년]] 졸업생들의 성금을 지원받아 제작된 리다자오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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