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나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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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9년([[1540년]]) 지쿠아미(竹阿彌)의 아들로 히데요시 양아버지의 동생으로 태어났다.(일설에는 친동생이라고도 한다.) 어릴 적에는 히데요시가 집을 나가 버렸기에 서로 잘 알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히데요시와 네네가 결혼한 [[에이로쿠]](永祿) 7년([[1564년]]) 후라는 설이 많다. 결혼 후 히데요시가 아시가루 소두(小頭;부관이 아닐까?)로 출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가신을 고용할 정도의 녹봉은 없었다.
 
실제로 히데나가 이전에 의동생인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에게 가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는 얘기도 있다. 다만 무사의 기본을 하나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수년 만에 히데요시를 보좌할 수 있는 상태에까지 도달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히데요시의 직필은 도장이나 수결(사인)이 많아 세심한 서류 관계의 일에는 매우 약하다는 설도 있어 가신이 적었던 시기에는 히데나가 자신이 직필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히데요시가 세밀한 지도나 작업을 히데나가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보좌역이란 이미지가 이때부터 부여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겐키]](元龜) 원년([[1570년]]) [[에치젠노쿠니|에치젠]](越前 ;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본거지가 있는 지방) 토벌 도중 [[아자이 나가마사]](淺井長政)의 협공 소식을 듣자 오다군은 퇴각을 결정하고, 히데요시는 후위군을 맡게 되었다.(가네가사키의 탈출로 불리는 전투). 히데나가는 제1부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어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正勝)와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와 함께 전력을 다해 후방을 지켰다.
 
덴쇼(天正) 원년(1573년) 아자이 멸망의 공로로 히데요시가 성주가 되면서 이름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고쳤다. 또한 히데나가 자신도 어느 때는 성주 대리를 맡았고, 그 시기 나가히데(長秀)라고 개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름은 다른 오다가 가신들로부터 질시와 질투를 받았던 히데요시의 유일한 우방이었던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에게서라는 설이 강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히데나가 자신의 오른팔이라 불리게 되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등용되게 되었다. 이 주종 관계는 히데나가의 양자였던 히데야스(秀保)가 일찍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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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 의해 사망하자 히데요시의 거병에 따라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 참전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와 더불어 덴노잔()(天王山)의 수비를 맡았고, 전투 후 같은 해 종 5위하 미노노카미(美濃守)에 서위(敍位), 임관(任官)하였다.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 참전하여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군과 대치했다. 대치 도중에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가 거병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를 제압하러 간 사이에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이 본진에 침공해 왔다.
 
전투 도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淸秀)가 전사하였으나, 그 와중에 급히 회군한 히데요시군의 원군에 힘입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사료(史料)인 노인잡화(老人雜話)에 따르면, 히데나가는 히데요시에게서 키요히데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질책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행동이 용의주도했기 때문에 작전이었다는 설도 있다. 작전이라면 수비를 맡았던 히데나가는 진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노인잡화는 사료로서 의문시될 정도 가치를 의심받고 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 때, 히데나가는 모리야마(守山)에서 진군해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를 감시했다. 이 전투에서 조카 [[하시바 히데쓰구]](羽柴秀次)가 히데요시에게 질책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원정에는 히데나가가 히데쓰구를 데리고 함께 종군하고 시코쿠(四國) 정벌에서는 큰 전공을 세우게 하여 히데요시에 대한 히데츠구의 신뢰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덴쇼 13년(1585년) 기이(紀伊)국 사이가씨(雜賀氏) 공격에서는 히데츠구와 함께 히데요시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정벌 후 형으로부터 기이, 이즈미(和泉) 등의 64만 석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같은 해 와카야마성(和歌山城)의 축성시에 보청부교(普請奉行)에 도도 다카토라를 임명했다. 축성의 명수라고 이름 높았던 도도 다카토라의 최초의 축성이었다.
 
같은 년 6월 시코쿠 정벌에서는 형의 대리로서 10만을 넘는 대군의 총대장에 임명되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를 항복시킨 공적을 칭찬받아 그 포상으로 야마토를 하사받아 [[고리야마 성]](郡山城)을 거성으로 삼아 약 116만 석의 대 다이묘가 되었다.
 
유유자적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히데나가의 영토인 야마토, 이즈미, 기이는 신사와 사찰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결코 쉽사리 통치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하지만 히데나가는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서 가혹한 처벌을 피했기 때문에 후에 커다란 문제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정 면에서도 큰 공적이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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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에서는 별동대의 총대장으로서 출진하여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공적으로 인해 8월에 종 2위 다이나곤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덴쇼 18년(1590년) 1월경부터 병으로 쓰러져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동생을 걱정하여 오다와라 정벌 이전에도 병문안으로 몇 번이고 방문하였고, 나라의 신사에 동생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기원도 빌었다.
 
덴쇼 19년(1591년) 1월 22일 야마토 고리야마 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52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문은 조카 도요토미 히데야스(秀保)를 양자로 들여 잇게 하였다. 히데나가의 장례는 같은 달 29일 대덕사 고계화상의 인도로 성대하게 치렀다. “들과 산에 사람들이 가득찼다”라고 말할 정도로 추모객이 모여들었다고 고서에서는 전하고 있다.
 
계명(戒名)은 “대광원전전아상춘악소영대거사(大光院殿前亞相春岳紹榮大居士).” 현재 [[야마토코리야마 시]]에 [다이나곤무덤(大納言塚)]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오사카 시]] 중앙구 호코쿠 신사(豊國神社)에는 형 히데요시와 조카 히데요리도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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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형을 생각하고 동생의 신분을 넘지 않으면서 형에 대한 걱정으로 조언과 간언을 그치지 않았다. 이런 훌륭한 동생 덕에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한 히데요시였기에 동생의 말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였다.
 
* 히데나가는 형이 진행하였던 조선 침공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병석에 있을 때 그는 “지금까지 외국과의 싸움에서 인마와 병량을 소비하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손실은 크나큰데, 어느 것도 얻은 것은 없다. 화친을 맺고 교역을 하는 것만이 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조선 침공을 위해 [[센 리큐]](千利休) 할복, 도요토미 히데쓰구 처벌 사건 등의 난행은 히데나가의 사후에 일어났다.
 
또한 히데나가가 진행하고 있던 체제 정비도 히데나가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어 문치파 관료와 무공파 무장과의 대립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히데나가가 히데요시보다 더 오래 살았다면 히데요시 만년의 어리석은 행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찬탈을 방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이유로 히데나가의 죽음은 토요토미 정권을 동요하게 만든 크나큰 손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 출병에 반대한 건에 대해서는 출처가 “무공야화(武功夜話)”의 것이기에 그 진실성에는 의문의 목소리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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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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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540년 태어남]]
[[분류:1591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