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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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성수침 필적.jpg|썸네일|왼쪽|170px|아버지 [[성수침]]의 글씨]]
 
우계 성혼은 [[1535년]]에 [[한성부]] 순화방(順和坊)태어났다. 아버지는 사후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된 [[성리학]]자 [[성수침]](成守琛)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고려]]가 망하자 은거한 [[성여완]](成汝完)의 후손으로, [[함흥차사]]로 유명한 [[성석린]](成石璘)의 종6대손이며 그의 동생인 예조판서 [[성석인]](成石因)의 6대손이었다. 종6대조 [[성석용]]은 [[성삼문]]과 [[성담수]], [[성담년]]의 증조부이며 [[이기 (1476년)|이기]]의 외고조부였다. 5대조 성억은 [[좌찬성]]이었고, 고조부 [[성득식]]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증조부 충달은 현령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사숙공 [[성세순]]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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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기 ====
 
[[파일:Huam Baik In-geol.jpg‎|thumb|left|130px|스승 [[휴암 백인걸]]<br>(그는 [[조광조]], [[김식]], [[김안국]]의 학통을 다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에게 전수하였다.)]]
{{참고|성리학}}
 
[[1551년]](명종 6년)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17세 때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그해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 뒤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이후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백인걸]](白人傑)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백인걸]]에게서 그는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와 본격적으로 나이를 초월한 도의지교를 맺었다.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생인 장포(長浦) [[김행 (1532년)|김행]](金行) 역시 [[성수침]]의 문하와 [[백인걸]]의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하였다. 장포(長浦) 김행은 그를 친아우처럼 아꼈고, 평생 그와 형제처럼 지냈다.<ref>[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525 김행]</ref>
 
그 뒤 관직에 나가는 것 대신 학문 연구와 독서로 소일하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찾아가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에 감격한 그는 그 뒤 [[이이]]와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였다. 또한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의 절충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이이]]의 이기일원론에 반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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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과 후학 양성 ====
 
[[경기도]][[관찰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특별히 [[전생서]] [[능참봉|참봉]](參奉)을 제수받았는데, 이후 계속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혼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 뒤 [[적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번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고 [[공조]][[좌랑]]과 [[공조]][[정랑]]을 잠시 지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이이]] 등이 찾아와 그에게 관직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명종]] 말엽에 [[이량]], [[이기]], [[심통원]], [[윤원형]] 등의 외척 권신들이 몰락하고 사림파들이 정치에 등용되자 그 역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있지 않거나 사양하기를 반복했다.
 
[[1564년]] 아버지이자 첫 스승인 [[성수침]]의 상을 당하다. 부친이 병환에 위독할 때 그는 두번이나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생없이 부친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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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선조 어필.JPG|썸네일|왼쪽|110px|[[조선 선조|선조]] 어필]]
선조 즉위 후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1568년(선조 1년)에는 이황을 만나 사물을 담론하였다. 이때 그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절충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 뒤로 [[1572년]]부터 7년간 [[이이]]와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기 논쟁을 한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어 내려가던 중 귀향을 허가받지 못하여 다시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그가 되돌아오자 왕이 직접 문병하고 약을 하사한 뒤 치도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치도의 방법으로 간단하게 '임금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망므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근본이 서서 의리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라 하였고,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보필을 얻고 훌륭한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두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조선 선조|선조]]가 오늘날 조정의 인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그는 '몸을 용납하여 지위만 보전하려는 자가 많고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자가 적으니, 이는 우려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백성을 구제할 계책으로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주어야 하니, 이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 뒤 물러 나와 상소로 지어 다시 이 내용을 강조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 장령을 거쳐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이 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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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의 죽음과 은퇴 ====
1581년 내섬시첨정을 사직하고 낙향했고 이후 여러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는다.
 
1583년 [[병조]][[참지]]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상경하고, 바로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특명으로 이조참판으로 승진했으나 [[이이]]가 병으로 죽자 사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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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 ====
{{참고|정여립의 난|기축옥사}}
[[1584년]] [[이이]]가 죽자 출사하여 서인의 영수가 되었고 이때문에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1589년]]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동인]]을 일망타진하자는 데는 반대하였다.
 
[[1589년]](선조 22) 겨울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왕으로부터 '국가에 큰 변고가 있으니, 경(卿)이 물러나 산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밀지를 받고 조정으로 달려갔다. 그 뒤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동인]]을 일망타진하자는 데는 극구 반대하였다.
 
[[정여립]]의 옥사가 확대되어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그는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철]]은 그의 부탁을 거절했고, [[최영경]]을 위문하러 간 성혼의 아들과 측근을 [[최영경]]이 의심하면서, 최영경을 괘씸하게 본 성혼의 문하생들이 최영경을 탄핵, 그은 곤장을 맞던 중 장살된다. 그러나 최영경의 장살로 성혼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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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재와 수습의 실패 ====
[[파일:정철.jpg|thumb|right|160px|정치적 동지 송강 [[정철]]]]
 
그러나 옥사의 후유증은 계속되었고, 귀양 가거나 폄출(貶黜)당한 자들 중에는 그의 친구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후 그는 조정에 적극 출사하여 [[경연]]에서 강론을 하는 한편 동서 양당 간의 화해와 화합을 주장하는 한편 [[동인]]들에게 [[기축옥사]]의 확대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음을 설득하였다. [[류성룡]], [[우성전]] 등은 그의 설득을 일부 수용하였으나 [[이산해]]는 그의 해명을 변명으로 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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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과 정치 활동 ====
즉시 상소문을 작성하여 바로 도성에 가지 못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논열(論列)하여 대죄하고,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계책을 아뢰었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을 전적으로 천운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제왕들은 변고를 만나면 혹 조서(詔書)를 내려 자책하여 존호(尊號)를 삭제하고 혹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을 처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는 뜻을 분명히 알게 해서 국가의 흥복(興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파일:유성룡.png‎|thumb|right|110px|[[남인]] 당수 [[류성룡]]]]
 
그러나 왕을 호종한 신하들은 그의 상소를 변명으로 이해하여 그를 공격하려 들었다. 바로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그 뒤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광해 세자]]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경기 지역의 의병장들을 도왔으며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부임,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 영유(永柔), 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호위하던 중 발병하여 파주로 다시 내려갔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을 거쳐 좌참찬이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중 [[광해군|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1594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어 취임했다. 좌참찬으로 〈편의시무14조〉를 올렸으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해에 [[좌찬성]]으로 승진했고 [[비변사]] 회의에 참여하여 시무 12조를 올렸다.
 
환도 후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맺을 것을 주장하였다가 [[동인]] 강경파를 비롯한 일부로부터 매국노로 규탄받자 관직을 사퇴, 연안의 각산(角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후 그는 [[유성룡]], [[이정암]](李廷馣)의 화평론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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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성수침(成守琛)
** 어머니 : [[파평 윤씨]](坡平尹氏) - 윤사원(尹士元:정현왕후의 조카)의 녀
*** 부인 : [[고령 신씨]](高靈申氏, 군수 신여량(申汝樑)의 딸)
**** 장남 : 성문영(成文泳)
**** 차남 : [[성문준]](成文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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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un Jeung.jpg|썸네일|오른쪽|180px|외증손자 명재 [[윤증]]<br>(그는 [[소론]]의 초대 당수였다.)]]
 
그의 실천과 적극성이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오랜 친구인 [[이이]]는 그의 학문과 행적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외손자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한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동서 정쟁에서 중재적 역할을 하려 했던 점과, 이황과 이이의 사상을 절충하여 사상적인 소모전을 해결하려 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동시대인이자 친구인 [[율곡 이이]]는 그를 평하기를 "우계는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이다"라고 평했고, 자신과 비교함에 있어서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좀 나으나 수신과 학문의 힘씀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작품성에 있어서 청명 임창순은 "송익필의 초서는 기운이 넘쳐흐르고, 이이는 재기발랄하며, 성혼은 아버지 청송 성수침의 글씨를 이어받아 온화하면서 힘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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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과 영향력 ==
=== 출사관 ===
그는 세상이 혼탁하고 시류가 부패한 이유는 올바른 도덕군자, 선비를 등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올바른 선비란 산림에서 학문을 닦아 도덕군자가 된 다음 임금이 예를 갖추어 벼슬길에 나와 주기를 청할 때 비로소 천하와 더불어 선(善)을 함께하고 백성에게 덕(德)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단순한 재주만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사람됨됨이를 보지 않는 것이 곧 부패와 사회문제의 원인이라 보았다.
 
=== 교육 철학 ===
성혼은 서른일곱 살 때 자신의 교육관을 밝힌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서당의 벽에 걸어놓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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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세계대백과}}
 
{{Authority control}}
[[분류:성혼| ]]
[[분류:1535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