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두앵 1세 (예루살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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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원정시 형 고드프루아, 위그, 종형제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보두앵 드 부르]]와 함께 참가했다. 헝가리에서 부대의 안전한 통과를 위해 보두앵이 인질로써 헝가리 왕 곁에서 머물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오히려 비잔티움 황제의 아들을 인질로 맡겨진 시기, 보두앵이 그를 접대했다. 비잔티움측에서 십자군에 대한 기록을 남긴 황녀 [[안나 콤네나]]의 수기에 의하면 "휘하의 병사가 황제의 옥좌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자, 이를 꾸짖었다."라고 말해질 정도로 예의와 규율에 엄격했다고 한다.
 
[[소아시아]]에서 다른 십자군과 떨어져나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토를 욕심낸 [[노르만족]]의 [[탕크레드 (십자군)|탕크레드]]와 함께 [[킬리키아]]로 향했으나, 도중 탕크레드와 다투고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한편 보두앵은 에데사의 영주 토로스을 유혹해 그의 후계자가 되었고, 얼마안가 토로스가 폭동으로 살해당할쯤 잠시 피신해 있다가 돌아와 에데사을 지배했다.그는 새로얻은 공국을 강화하고, 아르메니아 귀족의 딸 아르다와 결혼해 아르메니아 토착민과 결속을 다졌다.
 
[[1100년]] 성묘의 수호자였던 형 고드프루아가 죽을때, 보두앵은 [[에데사 백국]]을 보두앵 드 부르에게 물려주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가 되었다. 왕국 남부에서 이집트 [[파티마 왕조]]와 싸워 위세를 떨쳤고, 십자군 귀족의 반대를 누르고 정식으로 그해 12월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였던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기를 원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데는 협력했다.
 
[[1101년]]의 십자군은 람라에서 대패했으나, 그 후 [[아르수프]](현재 이스라엘의 텔아르샤프)와 [[카이사레아]](이스라엘의 호르바트케사리)을 장악했고, [[1112년]]까지 [[아스칼론]]과 티레를 제외한 [[아크레|아콘]], 람라, [[트리폴리 (레바논)|트리폴리]], 시돈, [[베이루트]] 등 지중해 근해의 모든 해안도시를 점령해 영토를 넓혔다. [[1115년]] 왕국 남부를 지키기 위해 크라크 드 몽레알 성을 짓고, [[1113년]]에 아내를 수녀원에 유폐하고 시칠리아 백작의 미망인 사오나의 아들레이드와 결혼했으나 후계자 없이 [[1118년]] 이집트 원정중에 식중독에 의해 사망했다. 뒤를 사촌인 에데사 백국을 물려받은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보두앵 드 부르]]가 제2대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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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중요 인물}}
 
{{Authority control}}
{{DEFAULTSORT:보두앵 드 볼로뉴}}
[[분류:1058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