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고구려-당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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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적]](李世勣)의 당의 선봉 요동도행군은 유성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을 향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하지만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크게 돌아서 우회하여, 고구려가 예상치 못하던 북쪽 통정진으로 진군하였다. 이렇게 방어하는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 전법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 반복되었다. 과거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를 침공할 때 로마로 들어오는 길목 [[마르세이유]]에서 방어진을 치고 있는 로마군을 피해 북쪽으로 크게 돌아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를 침입하여 허를 찔렀고, 1940년5월, [[2차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독일이 프랑스의 주력부대가 방어하는 [[마지노선]]이 아닌 [[세당]]의 아르헨 산골로 독일의 주력 기갑부대를 집중시켜 돌파하여 영국-프랑스군의 허를 찔렀듯이, 수 백년 전 [[사마의]]가 요동 [[공손연]] 정벌 때 그랬던 것 처럼, 당의 대군도 고구려 주력이 방어하고 있던 강한 곳을 피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기습 도하하였다. 과거 [[고구려-수 전쟁]]때 수나라가 정공법으로 요하를 건너려고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치뤘던 것에 비하면 한층 전략적으로 연구한 허허실실의 기습이었다. 당나라 군도 고구려의 방어를 만만치 않게 본 결과이다. {{참고|고구려-위 전쟁|고구려-수 전쟁}}
마침내 여름 5월 1일(음력 4월 1일), [[이세적]]이 이끄는 당의 선봉 요동도행군은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다. 당시 현도성 추정 병력은 5천여명 정도이고 옛날 현도군을 이치시키기 위해 임시로 지은 진에 가까운 작은 성이었다. 허나 개모성이나 신성등 대성으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의 각 성들은 모두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로 들어갔다. 작은 현도성이 쉽게 함락되자 5월 5일(음력 4월 5일), 선봉부대의 부대총관 강하왕 [[이도종]]은 군사
한편 두 번째 남쪽 방면으로는 영주 도독 [[장검]]이
세 번째 해로를 통한 방면으로는 [[장량 (당나라)|장량]](張亮)이 당의 수군을 거느리고 산동의 동래로 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하지만 유격전에 명성을 떨친 당나라 장수 [[정명진]]이 군사를 데리고 선봉으로 야습을 시행하였고 부총관 왕 대도가 먼저 성에 올랐다. 5월 31일(음력 5월 1일),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천혜의 요새였던 비사성은 예상과 달리 당의 야간 기습에 너무나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세 번째 해로를 통한 방면으로는 [[장량 (당나라)|장량]](張亮)이 당의 수군을 1000여척(약 12만. 상륙군 4만 3천)거느리고 산동의 동래로 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비사성은
===1차 요동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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