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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자유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대장성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이케다 하야토]]에게 높게 평가되어 1953년,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에서 정부 대표를 맡았다. 1954년, 제5차 [[요시다 시게루|요시다]] 내각의 통상산업 대신 겸 경제 심의청 장관, 제1차 [[기시 노부스케|기시]]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제2차 기시 내각에서 법무대신 및 자치성 (自治省) 대신을 지내고, 제3차 [[이케다 하야토|이케다]] 개조 내각에서 문부대신 및 과학기술청 대신을 지냈다.
 
그 후, [[사토 에이사쿠|사토]]파 (派) 에 속해,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保利茂), [[마쓰노 라이조]] (松野頼三),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橋本登美三郎) 와 함께 [[사토파 오봉행]] (佐藤派五奉行) 이라고 불렸고, [[사토 에이사쿠|사토내각]] 내각 성립 후에 [[내각관방장관]]과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 외상 시절에는 [[오키나와 반환]] (沖縄返還) 에 관한 미·일 교섭을 담당해 오키나와 반환 협정 체결에 공헌하였다.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서 물러날 때에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하였고, 1972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다나카]] 내각에서 대장대신이 되었다. 1973년, [[스미소니언 협정]] (Smithsonian Agreement) 이 붕괴를 보이는 중, [[일본 엔|엔]]의 [[변동 환율|변동 환율제]]에의 이행이 결정돼 외환 거래가 크게 전환되는 상황을 일으켰고, 일본 열도 개조론 (日本列島改造論)<ref>[[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총리가 197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 주창한 일본 열도의 개조론.</ref> 에 의해 경기과열에 따른 심한 물건 부족과 인플레이션, [[욤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 전쟁]]에 의해 일어난 제1차 [[유류 파동]]의 표면화, 산유국에서의 석유 공급 삭감으로 인플레이션과 물건 부족의 정도가 심해지자, 재정부 장관 아이치는 적극적으로 각 국을 방문하여 경제 외교를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