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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혜종 건문제 주윤문'''({{lang|zh|明惠宗 建文帝 朱允炆}}, [[1377년]]: 홍무(洪武) 10년 [[12월 5일]] ~ [[1402(?)년]])은 [[명나라]]의 제2대 [[황제]]로 [[홍무제|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의 장손이자 의문황태자(懿文皇太子) [[주표]](朱標)의 아들이다. [[남명]]의 [[홍광제]]는 그에게 묘호를 혜종(惠宗)으로,시호는 사천장도성의연공관문양무극인독효양황제(嗣天章道誠懿淵功觀文揚武克仁篤孝讓皇帝)로 추증하였고, 청나라 건륭제는 시호를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로 추증을 하였다. 역대 명나라 황제 중 [[숭정제]](崇禎帝)와 함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황제로 숙부인 연왕 [[영락제|주체]](朱棣)에게 황위를 빼앗겼다. [[조선]]의 [[조선 단종|단종]]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
 
=== 초기 생애 ===
 
홍무 10년인 [[1377년]] [[12월 5일]]에 당시 [[황태자]]인 주표와 그 후궁 [[여빈|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윤문은 서장자로서 차남이었으나, [[황태자비]] [[상황후|상씨]] 소생의 적장남 우회왕 [[주웅영]](朱雄英)이 어린 나이에 죽자 주윤문이 황장손(皇長孫)이 되었고, 얼마 후에는 상씨의 양자로 입적되어 주원장의 적장손이 되었다. 그러나 [[1392년]] 4월에 황태자 주표가 38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15세의 나이로 황태손이 되었다. 주원장은 후계자로 자신의 기질을 닮고 북방의 방어에 큰 공을 세운 4남인 연왕 [[영락제|주체]] 쪽을 더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학사 [[유삼오]](劉三吾) 등 많은 신하들이 장자가 죽었으면 장손이 잇는 것이 원칙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ref>진병팔, 《자금성, 살아 있는 중국 이야기》, 청년정신, 2008년, 121쪽</ref> 이에 주원장은 주윤문을 황태손에 책봉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천명하였다. 황태손인 주윤문은 유삼오와 [[방효유]], [[황자징]](黃子澄), [[제태]](齊泰) 등에게 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참모로 삼아 차기 황제로서의 준비를 탄탄히 다져놓고 있었다.
 
=== 정난의 변 ===
 
[[1398년]]에 할아버지인 주원장이 71세를 일기로 붕어하자, 주윤문이 22세로 명나라의 제2대 황제로 오르니 이가 혜종 건문양황제(惠宗 建文讓皇帝)이다. 건문제는 제일 먼저 할아버지 주원장의 유지에 따라 숙부들에게 [[난징|남경]]으로 문상을 오지 말라 하였다. 또한 너무나 커져있던 숙부들의 세력을 끊으려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왕 주체를 필두로 한 [[번왕]], 즉 건문제의 숙부들과 사촌들은 이에 반발하며 주체를 중심으로 몰래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부에 대항할 방책을 세우고 있었다. 명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고심한 끝에, 세가 약한 번왕들을 수도인 남경으로 한 명씩 은밀히 불러들여 체포한 후, 유배를 보내거나 죽여 버렸다. 유약했던 건문제는 숙부들을 핍박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적극적으로 찬동하지는 않았다.<ref>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에도, 건문제는 숙부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며 우유부단한 태도를 견지하였다.</ref> 그러나 방효유를 비롯한 여러 근황파 대신들이 간곡히 주청한 결과, 지방 번왕들의 영지로 첩자와 자객들이 파견되었으며, 그들의 언동을 비밀리에 감시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연왕 주체는 건문 1년인 [[1399년]]에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정난의 변]]'(靖難之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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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문제의 최후설 ===
건문제의 최후설은 여러가지로 나뉘어 있다. 남경의 궁전에 불을 질렀을 때, 그 불에 타 죽었다는 설과, 남경을 빠져나와 양자강에 투신했다는 설, 도사가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설은 승려가 되어 중국 곳곳을 유람하며 다녔으나, 정통 5년인 [[1440년]], 영락제의 증손자인 [[정통제]](正統帝) 때에 이르러 신분이 알려져 [[북경]]에서 살다가 [[1445년]]에 생을 마쳤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영락제가 대대적으로 추진한 정화의 남해 대원정의 목적도 건문제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 시호, 묘호 ==
영락제가 즉위 한 후에 신하들이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효민황제'''(孝愍皇帝)로 올리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폐제(廢帝)라는 이유로 황제의 시호를 불허하였다. [[남명]]의 [[홍광제]]의 의하여 황제로 복원시키면서, 묘호를 '''혜종'''(惠宗)으로, 시호는 '''사천장도성의연공관문양무극인독효양황제'''(嗣天章道誠懿淵功觀文揚武克仁篤孝讓皇帝)로 추시하였다.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 남명을 인정하지 않은 청나라의 황제인 [[건륭제]]는 시호를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로 추증을 하기도 하였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