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산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Parkasol (토론 | 기여)
Parkasol (토론 | 기여)
8번째 줄:
== 생애 ==
=== 초기 생애 ===
본명은 윤달선으로 [[수송소학교]]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한제국]] 말기의 시종무관이었던 [[윤치성]]과 두번째 부인 서경덕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치성은[[조선]] 이미[[조선 상처한선조|선조]] 상태에서때의 서경덕과형제 재혼하였는데정승 [[윤두수]], 포산에[[윤근수]] 의하면형제의 후손으로 6대조 [[조선윤세겸]]이 고종|고종동지돈녕부사를 황제지냈고, 5대조 윤발은 관직이 없었다. 고조부 [[윤득실]] [[윤치성통덕랑]] 젊은역임했지만 나이에[[술]]을 상처한좋아하여 것을38세로 딱하게요절했다. 여겨,증조부 자신의[[윤취동]]은 승은을일찍이 입었던고아가 궁녀되어 하나를 윤치성에게[[윤교동]]의 내려주었다고슬하에서 한다.양육되었으며 생애[[아산군]] 후반의[[둔포면]]으로 포산은분가하여 자신의농토를 시중을마련하고 들던부농이 됐다.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이 도일무관으로 스님출세하면서 다시 상좌들에게집안을 이를일으켜 강조하였다세웠다.
 
아버지 [[윤치성]]은 이미 상처한 상태에서 서경덕과 재혼하였는데, 포산에 의하면 [[조선 고종|고종 황제]]가 [[윤치성]]이 젊은 나이에 상처한 것을 딱하게 여겨, 자신의 승은을 입었던 궁녀 하나를 윤치성에게 내려주었다고 한다. 생애 후반의 포산은 자신의 시중을 들던 도일 스님 등 상좌들에게 이를 강조하였다. [[1910년]](융희 4) [[10월 1일]]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아버지 [[윤치성]]은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그는 18세에 [[광주 학생 운동]]에 연루된 것이 출가 동기로 작용, 19세에 [[오대산]]에 입산했다가 [[만공 (승려)|만공]]을 은사로 하여 [[정혜사]]에서 득도하였다.<ref name="ppp41">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