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산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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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윤치성]]은 이미 상처한 상태에서 서경덕과 재혼하였는데, 포산에 의하면 [[조선 고종|고종 황제]]가 [[윤치성]]이 젊은 나이에 상처한 것을 딱하게 여겨, 자신의 승은을 입었던 궁녀 하나를 윤치성에게 내려주었다고 한다. 생애 후반의 포산은 자신의 시중을 들던 도일 스님 등 상좌들에게 이를 강조하였다. [[1910년]](융희 4) [[10월 1일]]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아버지 [[윤치성]]은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그는 18세에 [[광주 학생 운동]]에 연루된 것이 출가 동기로 작용, 19세에 [[오대산]]에 입산했다가 [[만공 (승려)|만공]]을 은사로 하여 [[정혜사]]에서 득도하였다.<ref name="ppp41">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1</ref> [[1926년]]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가 [[1928년]] 이것이 탄로나게 되자, 그 이듬해인 [[1929년]] 속세를 버리고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 출가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