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산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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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지리산]] 칠불선원 조실로 추대되었고, [[1935년]] [[합천]] [[해인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그밖에 백련암, 지리산 칠불암, 금산 태고사 등지에서도 수행하였다. 그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제선, 정영, 향엄당 성련 등이 포산을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조실로 추대되자 그의 사형이었던 [[고봉]]은 이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고, 한동안 포산은 사형 [[고봉]]과 감정대립을 하며 갈등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그의 5촌 당숙 [[윤치호]] 등 몇몇 사람들과 방문 혹은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무렵 ===
그는 당시 승려의 신분이었으므로 창씨개명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징용을 피하기 위해 [[1936년]] [[문경군|문경]] [[사불산]]에 은신하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 총독부는 [[해인사]] 주지 [[변설호]]를 앞세워 [[해인사]] [[백련암]]의 범종을 떼어갔다. 이때는 그의 문하 제선이 백련암 원주였는데, 잠깐 [[해인사]]를 비운 사이였다. 포산이 해인사로 오자 제선은 그 사실을 보고했다. 포산은 그러냐 하며 그 절 주지를 올라오라고 했다.<ref name="name45">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5</ref> 그 때의 주지가 [[변설호]]였다.
 
큰스님이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하고 전하자 변설호가 알고 [[백련암]]으로 오기는 했지만 어두운 방에 앉아있는 주지 방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방문도 열지 못하고 주저주저했다. 제선이 뒷문을 열고 주지 왔습니다 하자 포산은 꾸중도 안하고 짧게 "자네 알겠지?" 한마디만 던졌다. 그러자 [[변설호]]는 네 갖다 올리겠습니다 하고 다시 백련암 범종을 달아 놓았다.<ref name="name45"/> 일제 강점기 후반 [[논산]] [[개태사]]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환속한 불자 [[김광영]]의 중매로 그의 딸 유진팔과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