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개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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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신정부가 추진한 [[식산흥업]]과 [[부국강병]], [[탈아입구]] 등 일련의 정책 추진과 서양 건축 (→ 서양관, 서양풍 건축), 이발, 양장, 양식 등을 장려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화은 도시와 일부 지식인에 한정된 서양 문명의 섭취였다는 지적도 있었으며, 지방 도시와 시골 지역에서는 장소에 따라 [[쇼와 시대]]에 접어들 무렵까지 불을 [[유채]] 기름으로 등을 밝혔고, [[우편]]과 [[전신]] 등 서구화의 혜택은 좀처럼 닿지 않았고, 오랫동안 후기의 전통과 풍습을 따르는 등 생활의 변화는 훨씬 완만한 것이었다. 지방에서는 새 정부의 방침에 따라 현청 주도로 기존의 생활 문화와 민속 풍습의 배척하며, 문명개화 정책의 영향으로 축소나 두절된 민속 풍습도 많다.
 
또한 급속한 서구화의 한 단면에는 서양 열강이 당시 아시아 국가로부터 한창 식민지 경영으로 막대한 부를 빼앗았던 것에 대한 위기감도 발견된다. 이 가운데는 위에 언급한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서양 군사 기술의 도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군대에서 군인의 힘과 체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공되는 식사(군대식)까지도 서구화되었다. 당시 출범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일본군은 지방 농촌 등의 차남, 삼남을 모았던 집단이었으며, 쌀밥과 일식으로 자란 그들 가운데는 너무 이질적인 서양 요리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해군 등에서는 쌀밥과 [[카레]]를 결합하였고, 고기처럼[[니쿠자가]]처럼 [[간장]] 맛의 절충한 요리를 개발하는 등의 연구도 활발했다. [[카레라이스]]는 이후 요코스카 해군 카레로, 소고기 감자 조림 같은 음식도 군항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간 시대를 통해 [[쇼와 시대]]에 접어들 때쯤에는 일반 가정의 맛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