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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중진으로 당색을 초월하여 [[서인]] [[김육]]의 [[대동법]]에 적극 지지를 보냈으며,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의 석방을 탄원하였고,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사면, 복권 여론을 주도하다가 파면당하기도 했다. 이후 당색을 넘어 [[송시열]] 등의 [[소현세자]] 일가 복권 운동에 동참하였다. [[1660년]] [[제1차 예송 논쟁]] 때에는 [[송시열]], [[송준길]]의 기년복에 반대하였으며, [[1663년]] [[윤선도]]가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자, 여러 번 [[윤선도]]를 옹호하다가 파직, 금고당하기도 했다.
 
[[1669년]] [[강원도]] 고성군수로 나가 치적을 쌓았고 [[1672년]] 그가 사직하자 강원도관찰사 안진이 다시 상소를 올려 특별히 고성군수에 재임명되었다. 이후 제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승지, 부제학, 이조참의, 대사헌, 공조참판 등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1676년]](숙종 2) 대사성, 예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허견의 옥사]]에 같은 [[남인]] 당원이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신원(伸寃)되고 [[1690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남양 홍씨 당홍계|남양]](南陽)으로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