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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南師古, [[1509년]] ~ [[1571년]])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영양 남씨|영양]](英陽), 자는 경원(景元) 또는 경초(景初) 복초(復初), 호는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깨달은 바가 있서 격암(格庵)이며 [[천문]]·[[지리]]에 통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종(中宗) 4년(1509) 울진 수곡리에서수곡리에서이조 좌랑 (吏曹佐郞: 정6품 전랑) 남희백(南帝伯)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는 유학(儒學)에 심취, 중년에는 역학, 천문, 지리 등에 통달하였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확고한 뜻을 세워 학문이나 재물을 쉽게 또는 구차하게 얻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절제된 자세를 견지하였으며, 평생동안 «소학(小學)» 을 책상 위에 두고 보면서 몸소 실천하였다. 명종 19(1564)에 효렴(孝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사직서(社稷署) 참봉(參奉)에 제수됨, 말년에 천문학 교수(종6품)을 역임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해동강절(海東康節)’이라 불렀다.
 
== 설화 및 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