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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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로, [[조선 정종|정종]]의 서자인 [[무림군]]의 후손이다. [[1894년]] [[과거 (조선)|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등 무관 벼슬을 지냈다.
 
1894년에 [[의친왕]] 이강을 수행하여 도일하였고, [[1895년]]부터 약 1년간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한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때부터 [[일본 제국|일본]]과 가깝게 지내면서 군사 분야의 [[친일파]]로 활동했다. [[1900년]]에는 일본으로 피신한 망명자와 연락한 혐의로 2년 동안 구금되고 유배형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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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고종황제가 [[이완용]], [[송병준]]에게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퇴위를 강요받자, 태자에게 군국의 대사를 대리하게 하였으나, 양위는 하지 않았다. 이에 이병무 등이 황제를 알현하고 퇴위를 강요하였다. 고종이 허락하지 않자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찌르려 하면서, 폐하는 지금이 어떤 세상인 줄 아시느냐고 물었고, 고종은 그 위협을 이기지 못하여 퇴위하였다.
 
[[1907년]]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 군부대신으로 입각하여, [[한일신협약]] 체결로 군대를 해산할 때, 이를 주도했으며, 해산된 군대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났을 때 의병 탄압을 지휘했다. [[1909년]] [[군부 (대한제국)|군부]] 가 폐지되고 [[친위부]]가 설치되자 초대 친위부 대신이 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 시종무관장으로 조약 체결에 적극 협조하여 [[조선귀족|자작]]에 봉해졌다.
 
일본 정부로부터 [[1907년]] 훈1등 욱일장,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이병무 사망 이틀 후인 1926년 12월 8일 일본 정부는 욱일동화대수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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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06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꺾쇠표=예
|발행년도연도=2006
|발행월=12
|id=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