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룡: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Namobot (토론 | 기여)
봇: 인용 틀 변수 이름 수정
42번째 줄: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20277
|출판사=오마이뉴스
|작성일자날짜=2006-03-30
|확인일자=2008-05-17
}}</ref>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음반 상점을 운영하였고, 두 살 아래의 여동생 이난영을 가수로 데뷔시켰다.
51번째 줄: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57941
|출판사=오마이뉴스
|작성일자날짜=2003-12-08
|확인일자=2008-05-20
}}</ref><ref>{{뉴스 인용
58번째 줄: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40405
|출판사=오마이뉴스
|작성일자날짜=2003-08-25
|확인일자=2008-05-20
}}</ref> 신민요의 여왕으로 불리던 [[기생]] 출신 가수 [[이화자]]의 〈마지막 필적〉(1942)과 같은 해 발표된 [[장세정]]의 〈아가씨 위문〉 등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남북 분단을 묘사한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광복 후에도 명성을 유지하던 중,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봉룡은 김해송 실종 이후 동생 이난영을 데리고 [[부산광역시|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이난영은 7남매를 혼자 키우며 어렵게 생활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김해송]]은 [[조선인민군]]에게 사살당했다는 소문만 남기고 돌아오지 않았고,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는 김해송의 곡들은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가 없었다. 이 가운데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작곡자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은 곡도 있었다.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고운봉]]의 〈[[선창 (노래)|선창]]〉, [[백년설]]의 〈고향설〉, 이화자의 신민요 〈화류춘몽〉 등 그 수는 적지 않다.
 
후에 [[이난영]]과 [[김해송]]의 딸들이 결성한 음악 그룹 [[김시스터즈]]의 멤버 중에는 이들과 외사촌 사이인 이봉룡의 딸도 포함되어 있다. 이봉룡은 1956년에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58년에는 센츄리(Century)레코드 전속작곡가로 있었으며, 이후 음반 기업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하여 생활했다.
 
말년까지 작곡 활동을 계속했으며, 1961년부터는 직접 엘케엘(LKL)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1969년]]에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1986년]]에 잠시 귀국하여 여관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1월 9일]] 사망했다. <ref name="이봉룡1">《문화원형백과》,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이봉룡, 李鳳龍), 한국콘텐츠진흥원(문화콘텐츠닷컴, 2009년)</ref><ref name="이봉룡2">「한국 작곡가 사전」, 이봉룡(李鳳龍),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저, 시공사(1999년, 342~518p)</ref>
 
== 가족 관계 ==
본명이 이옥례(李玉禮)였던 이난영이 인기 가수가 되자, 악극단에서 만난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던 김해송은 처남이 된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1950년]] 6·25남침 때 김해송은 납북됐고 홀로있던 이난영에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남인수가 연민의 정을 표하며 다가왔다. 2살 아래의 연하였지만 우정을 넘어 연정이 싹튼 두 사람은 세간의 입방아를 무시하고 동거생활을 하였다. 남인수 또한 1962년에 45세 나이로 요절했다. 이난영은 1965년 4월 50세 나이로 회현동 빈집에서 죽었다.
 
생전에 오빠 이봉룡은 [[1934년]]에 [[가수]]로 먼저 데뷔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 [[작곡가]]로 데뷔하여 동생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1942)가 크게 히트하는 등 인기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지금까지도 목포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았다. <ref name="이봉룡1"/><ref name="이봉룡2"/>
 
== 같이 보기 ==
87번째 줄:
|제목=가요 작곡가 李鳳龍씨 투숙여관서 변사
|출판사=조선일보
|작성일자날짜=1987-01-10
|쪽=11면
}}
94번째 줄:
|url=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4939&r_serial=02
|출판사=동아방송 DBS
|작성일자날짜=2008-01-30
|확인일자=2008-05-17
}}
*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저, 현실문화연구(2008년, 521~537p)
 
[[분류:1914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