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숭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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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중|en:Cult of personality}}
 
'''개인숭배'''(個人崇拜)는 독재자 혹은 특정 인물이 자신 혹은 특정 인물을 [[대중 매체]], [[프로파간다]]와 같은 방법으로 이상적, 영웅적이고 가끔 신적인 느낌을 불어넣어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행위이다. 개인 숭배의 현상은 주로 [[아첨]]이나 [[찬양]]의 형태로 보인다. [[사회학|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권위의 3부 분류에서 개인 숭배 현상을 “카리스마적 권위주의”로 분류했다. 위인의 신성화와 개인 숭배는 형태적으로는 비슷하나 대중 매체와 프로파간다의 사용 유무에 따라 구분된다.
 
개인숭배는 다양한 수준에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매스 미디어]] 등에서는 [[아이돌]]이나 [[탤런트]] 등 [[연예인]]이 있으며, 또한 [[종교]]도 지도자의 형태로 신앙을 모으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특히 [[대중매체]]와 [[선전]]을 통해 이루어지는, 국가지도자에 대한 우상화와 영웅화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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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파일:Cin Shihhuang Shaanxi statue.jpg|250px|섬네일|오른쪽|[[진 시황제]] 동상]]
역사 속에서, 거의 모든 [[군주]]와 [[국가 원수]]들은 엄청난 규모의 숭배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군주의 정권은 신에 의해 부여받았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 [[일본]], [[잉카 제국]], [[아즈텍 제국]], [[티베트]], [[시암]], [[로마 제국]]과 같은 제국들은 특히 군주를 신격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와 19세기 이후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와 [[세속주의]]의 확산 이후로 군주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아우라를 만들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사진술]], [[녹음]] 기술, [[영화]], [[대량 생산]] 기술, [[공립 학교]]와 상업용 [[광고]] 기술의 발전은 이전에는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로 지도자들을 좋은 이미지로 미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20세기에는 유명한 개인 숭배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숭배는 [[정치적 종교]]의 한 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목적==
개인 숭배 현상은 [[전체주의]] 정권이 급진적인 사상에 따라 사회를 변혁하려고 할 때 만들어진다. <ref>[http://www.historyguide.org/europe/cult.html]</ref>때때로 혁명적인 변혁을 주도시킨 지도자가 자신이 없으면 국가의 밝은 미래는 오지 않는, 국가의 “자애로운 지도자”로 다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개인 숭배 현상은 20세기에 일어난 [[아돌프 히틀러]]나 [[베니토 무솔리니]], [[이오시프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모든 [[독재]] 권력이 개인 숭배를 시행하지 않고, 개인 숭배 현상은 독재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어떤 독재자들은 자신에 대한 과찬을 최소화하는 사례도 있다. [[크메르 루주]]의 독재자 [[폴 포트]]의 경우에는 공식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정권이 끝날 때 까지 해외에서는 그의 정체에 대해 논쟁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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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개인 숭배는 [[중국 국민당]]과 [[중화민국]]이 있게 한 [[쑨원]](孫文)에 집중되어 있다. 쑨원 사후 개인 숭배는 [[장제스]](蔣介石)에게 집중되었으며 정부가 [[타이완]](臺灣)으로 이전할 때도 개인 숭배가 시행되었다. 보통 ''“장공{蔣公}”''으로 많이 불렸으며, 인쇄물에 박힌 그의 이름은 [[태두|그의 직위와 이름 사이를 띄어쓰기]]하게 되었다. 장제스를 찬양하는 교과서와 노래들은 1987년([[계엄령]] 해제)까지 흔히 볼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한 행적에는 개인 숭배가 포함되어 있었다. 1981년 이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는 마오쩌둥의 개인 숭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마오쩌둥 숭배는 [[문화대혁명]]기에 최정점을 찍었다. 마오쩌둥은 대체로 ''“위대한 지도자 마오 주석”''으로 불렸고 문화 대혁명 시기에 ''“위대한 지도자이며 최고 군 사령관이며 위대한 선생님이며 위대한 조타수”''의 명칭이 붙여졌다.<ref>[http://books.google.co.kr/books?id=J5QbQpQTegwC&pg=PA421&lpg=PA421&dq=he+great+leader,+the+great+commander,+the+great+teacher+and+the+great+helmsman&hl=ko#v=onepage&q]</ref> [[마오쩌둥 어록|그의 어록들이 담긴 책]]과 뱃지들이 대량 생산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오 주석의 어록을 낭송하거나 요구당했다. 충성 무용도 문화대혁명기간 동안 시행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권력 계승자인 [[화궈펑]](華國鋒) 또한 자신을 ''“뛰어난 지도자 화 주석”''이란 말로 숭배되었다. 그러나 1981년 개혁 이후 개인 숭배 동상은 파괴되었고 현재 [[중국 공산당]]은 개인 숭배를 문화 대혁명기간의 혼돈 때문에 좋지 않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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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나치 독일의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대중 선전에서 그 스스로를 ''“독일인의 최고 심판, 독일 제국의 일등 병사, 신독일의 일등 노동꾼, 영원한 최고 군 사령관, 유럽의 최고 군 지도자, 신성한 산의 신성한 수호자”''로 이름을 붙였다. 당시의 대중 문화는 히틀러를 두드러지게 표현했으며 히틀러를 독일인들에게 존경받고 사랑을 받는 신과 같은 형체로 묘사되었다.
 
===아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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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통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그의 통치 아래에 많은 우상화 작업을 벌였다. 우상화 작업은 ''“무솔리니의 말은 언제나 옳다”''로 시작했다. 비록 그가 르네상스 인, 군, 가족으로도 그려졌지만, 대개 그는 [[마초]]로 표현되었고, 모든 것에 능통한 만능인으로도 묘사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당시에 죽음을 이겨낸 것과 암살시도의 미수 신화는 독재자인 그를 신비롭고 불멸의 존재로 그려내었다. 게다가 매체들은 무솔리니를 신에게 선택받았는 것으로 묘사했고, 그를 전능하고 신과 같은 초인처럼 그려내었다. 매체에서 그는 이탈리아인을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한층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권력을 잡기 전부터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존재했으며, [[에티오피아]] 침공은 무솔리니의 야망인 [[로마 제국]] 부활이 그 목적이었다.
 
이탈리아가 민주주의를 회복한 후에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사람들이 2000년대에 들어서 자신이 장악한 언론을 통해 우상화 작업을 벌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ref>[http://www.repubblica.it/2009/06/sezioni/politica/berlusconi-varie-2/silvio-canzoni/silvio-canzoni.html]</ref> 그의 정당의 찬송가는 ''“베를루스코니에게 감사하자”''이다. 정당에서 그 자신을 자주 ''“예수”''에 비유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공공 여론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의 새로운 정치적인 영향을 가져왔고, 정치가의 [[카리스마]]가 부각되었으며, 언론을 통한 우상 숭배가 시도되었음을 드러냈다. 그는 이전에 10년간 4번에 걸쳐서 [[이탈리아의 총리|총리]]직을 연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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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위===
{{언제|날짜=2014-4-28|근 30년 간}} [[말라위]]를 통치했던 독재자 [[헤이스팅스 반다]]는 말라위 전역에 걸쳐서 광범위한 개인 숭배를 시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든 사무용 건물 외벽에는 그의 초상화가 반드시 걸려있어야 하며, 시계나 그림, 포스터와 같은 다른 물건들이 그의 초상화 위에 거는 것을 금지했다. 영화 상영 시작 전에 찬송가가 울리기 전에 항상 반다에 관한 영상이 나왔다. 반다가 어떤 도시를 순방하면, 항상 도시의 대표 여성이 공항에서 그를 접대하고 그를 위해 공연을 벌였다. 대통령을 접대하기 위해 특별한 옷을 입고 공연을 해야 했다. 이전 정부에 세워졌던 교회 건물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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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다른 국가들이 국가 지도자가 개인 숭배를 벌이는 것이라면, [[필리핀]]에서는 지역 정치인들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개인 숭배를 벌이기도 한다. 그들은 대중 매체에서 자주 ''“에팔 정치인''”으로 명명되는데, 이때 ''“에팔”''이란 필리핀 속어로 ''“관심을 끄는 사람”''의 뜻을 지닌다. 지역 정치인들은 정부 프로젝트 게시판에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걸며 자신의 이미지 향상을 한다.<ref>[http://www.philstar.com/headlines/763279/bishop-wants-anti-epal-bill-cover-politicians-holiday-greetings]</ref> <ref>[http://www.journal.com.ph/index.php/news/national/57283-luistro-has-no-problem-with-epal-politicians]</ref><ref>[https://ph.news.yahoo.com/blogs/the-inbox/posters-epal-politicians-ordered-removed-052148943.html]</ref>이러한 정치인 홍보가 심해지자 상원 법안 제 1967호, 혹은 반(反)에팔 법안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2011년 11월에 상원 미리암 산티아고가 정치인들의 에팔 행위를 근절하고자 제출했으며, 2013년에 다시 제출하였다.
 
===폴란드===
[[폴란드]]의 개인 숭배 현상은 폴란드의 군 사령관이자 정치인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전간기|1,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시작하여 그의 사후인 1935년에도 계속 지속되었고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2차 세계 대전 사이에 피우스트스키의 숭배 현상은 대중 매체에 의해 그를 정치적 선지자와 능숙한 전략가로 포장했다. 숭배 현상은 그의 업적인 1차 대전 후유증 기간의 폴란드 독립과 [[소련-폴란드 전쟁]], 수십년의 불경기 회복과 연관을 지었으며 특히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의 공산 정권]]때 그를 많이 찬양 하였다. 현재에도 피우스트스키는 폴란드 역사에서 많은 긍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폴란드의 독립기념일은 [[1차 세계 대전]]이후 그의 권력기반을 다진 11월 11일에 맞춰졌다.
 
===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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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파일:IstanbulGencirlikBayrami2005.jpg|200px|섬네일|오른쪽|[[이스탄불]]에서 아타튀르크를 기리는 초상화.]]
[[터키]]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기념하는 건축물이 터키 전역에 분포해있다. 그를 기리는 건축물로는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금각만]] 위에 설치된 [[아타튀르크 다리]], [[아타튀르크 댐]],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이 있다. 그를 주로 ''“위대한 지도자”'', ''“영원한 사령관”'', ''“최고의 교사”'', ''“터키의 영원한 지도자”'' 등으로 부른다. 아타튀르크 동상은 터키의 모든 도시에서 터키 정부에 의해 건립되었고, 대부분의 도시에서 그의 얼굴이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의 초상화는 터키의 모든 공공 기관, 학교, 교실, 교과서, 터키 화폐에서 볼 수 있으며, 터키 집안에서도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ref>Navaro-Yashin, Yael (2002). Faces of the State: Secularism and Public Life in Turkey.</ref>그의 사망 시기인 11월 10일 오전 9시 5분경에는 모든 일이나 운전을 중단하고 그를 기리는 추모식을 한다. 1951년에, 터키 의회는 그를 모욕하거나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파괴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이 법은 유효하다.<ref>Yonah, Alexander (2007). Turkey: Terrorism, Civil Rights, and the European Union. </ref> 정부 홈페이지는 이 법안을 위반한 홈페이지를 처벌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터키 정부는 그를 모욕하는 발언이 담긴 홈페이지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아타튀르크 숭배는 1920년 그를 새긴 동상이 건립되면서 시작했다.<ref>Touraj Atabaki; Erik J. Zurcher (1 September 2004). [Men of Order: Authoritarian Modernization Under Atatürk and Reza Shah.] I.B.Tauris. p. 4. </ref> “아타튀르크”라는 말 자체가 ''“터키의 아버지”''라는 말이며, 이후 “아타튀르크”라는 말은 터키 정치와 사회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고, <ref>M. Hakan Yavuz (19 February 2009). Secularism and Muslim Democracy in Turkey.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120. ISBN 978-0-521-88878-3. Retrieved 21 June 2013. "In other works there is a deeply internalized notion of Ataturk as the “father” of the Turks, and all politicians are very much measured against his cult of personality."</ref>이후 아타튀르크의 개인 숭배 현상은 학계에서 흥미를 끌기도 했다. 한편 아타튀르크 숭배 현상은 “현재에서 가장 긴 숭배 현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투르크메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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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가 1985년부터 2006년까지 정권을 장악했을 때 이례없는 개인 숭배를 벌였다. <ref>[http://www.theguardian.com/world/2006/dec/22/tomparfitt.mainsection]</ref><ref>[http://www.state.gov/j/drl/rls/hrrpt/2001/eur/8359.htm]</ref>니야조프는 [[루흐나마]]라는 책을 펼쳐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위대함을 주입시켜서 그를 찬양하도록 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책에는 그에 대한 [[창조 신화]]도 들어있었다.<ref>[http://www.crisisgroup.org/]</ref> 니야조프 정권 시기에 표현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는 극도로 억압되었으며,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해외로 추방당했으며, 국외로 망명을 가기도 했다. 또한 남겨진 그의 유가족들은 이후에 그의 어용 정권에게 핍박당했다. 투르크메니스탄 전역에서 그를 기리는 초상화나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그의 실루엣이 담긴 로고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망 이후 미 정부는 니야조프 숭배 현상을 “국가 주도의 종교”라고 평가하였다. <ref>[http://www.uscirf.gov/news-room/press-releases/315-january-03-2007-turkmenistan-ending-the-personality-cult.html]</ref>
 
그의 사후 숭배 현상은 막을 내렸는 것 같으나, [[국제 인권 감시회]]가 출판한 “2012년 세계 현황” 에 따르면,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가 그의 뒤를 이어 숭배를 벌이는 것으로 밝혔다.<ref>[http://www.hrw.org/world-report-2012/world-report-2012-turkmenistan]</ref> [[AFP (통신사)|프랑스 통신사]]와 [[국경 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이전의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투르크메니스탄 전역에 그를 기리는 동상과 초상화가 이전 대통령을 대신해서 새로운 대통령인 베르디무함베도프를 기린다고 밝혔다.
 
=== 베트남 ===
[[파일:Ho Chi Minh statue.jpg|150px|섬네일|오른쪽|[[베트남]] [[호찌민 시]]에 위치한 호찌민 동상.]]
[[베트남]] 공산 정권은 1950년경 [[북베트남]] 시절에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개인 숭배를 벌였고 후의 [[베트남의 통일]] 이후에 남쪽으로 확대되었다. 호찌민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주 영웅시되고, 출판물이나 방송에서 호찌민이나 그의 결함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보도한 아나운서와 함께 “인민 혁명에 반한다”라는 구실로 체포되거나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심지어 호찌민은 [[베트남 공산당]]으로부터 ''“불변의 성인”''으로 종교적인 지위를 받는다. 이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베트남 전쟁]] 이후 [[호찌민 시]]로 개명되었다.<ref>[http://www.bbc.com/news/world-asia-18328455]</ref>
 
=== 자이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