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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흥시|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나중에 정치적으로 적이 되는 [[박헌영]]과 동기생으로 [[1915년]] [[경성부]]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졸업은 고향인 함흥에 돌아와 함흥고등보통학교에서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유학한 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첫 작품 〈그날 밤〉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27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카프]] 창립 초기부터 가담하여 계급문학의 이론적 확립과 그 문학적 실천에 앞장섰다.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된 〈그 전후〉와 〈뒷걸음질〉 등에 이르러서는 경향적 색채를 짙게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당시 농촌의 현실인 빈궁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몰락해 가는 농촌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한설야는 1934년 다른 카프 문인들과 일경에 의해 검거되는데, 이 시기를 맞이해 일대 전환의 모습을 보인다. 즉 그의 작업은 삶의 구체성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화에 집중된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작품이 1936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황혼》이다. 《황혼》에서는 당대 자본가의 삶과 노동자의 삶을 대조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카프 활동과 비밀 결사 활동으로 [[신건설사 사건]] 때 검거되는 등 [[일제 강점기]] 동안 두 차례 투옥되었다.
 
광복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함경도 대표를 지냈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역임하는 등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정치적인 성공을 누렸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조선문학가총동맹]] 위원장을 지내면서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숙청을 주도한 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지내고 교육상과 인민상을 수상하고 [[1957년]] [[9월]]에는 내각 교육,문화상에 임명되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1962년]] 《문학신문》에 연재하던 시조가 예고 없이 돌연 중단되면서 숙청되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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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조영복
|제목=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발행일자날짜=2002-09-10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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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2000.9.29) (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0/003000000200009290813054.html 월북작가 '한설야'의 복권 경위) (《한겨레신문》 재인용)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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