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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황신덕.gif|thumb|200px|황신덕]]
 
'''황신덕'''(黃信德, [[1898년]] ~ [[1983년]] [[11월 22일]])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교육자,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교육자, 여성운동가이다. 본관은 [[제안 황씨|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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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숭의여자고등학교|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한 뒤로는 《[[시대일보 (1924년)|시대일보]]》, 《[[조선중앙일보|중외일보]]》, 《[[동아일보]]》의 기자와 동아일보가 발간하던 여성잡지 《[[신가정]]》 기자로 근무했다.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에 가담하였고 [[신간회]]와 [[근우회]]에도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탈출했다. [[1952년]]에 여성문제연구회를 창립하고 1956년에 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하였으며, 가정 내 여성의 불이익을 구제하는 활동, [[이태영]] 등과 함께 가족법 개정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이후 교육 활동, 여성 운동에 종사하였다.
 
[[추계예술대학교]]와 중앙여중, 중앙여고의 설립자이다. 독립운동가 겸 여성운동가 [[황애덕]]과 자매간이다.
 
=== 생애 초기 ===
황신덕은 [[평안남도]] [[대동군]](현 [[평양직할시]])에서 황석청(黃錫淸)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안(齊安)아고 아호는 추계(秋溪)이다. [[1898년]]생으로 일설에는 [[1889년]]생이라고도 한다. [[평양직할시|평양]] 출신으로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3·1 운동]]에 참가했고 [[3·1여성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황애덕]]이 황신덕의 언니이다.
 
평양의 정진소학교를 졸업한 후 [[황애덕]]이 교사로 있던 평양의 [[숭의여자고등학교|숭의여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숭의여고 재학 중 비밀결사조직인 송죽회(松竹會)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어배격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 유학과 독립 운동 ===
[[1919년]] [[숭의여자고등학교|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일본에서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다. 그해 [[3월]] 전국적인 만세 소요가 계획되자 입국하여 [[3·1 만세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체포를 모면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학업에 복귀했으며,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일에는 일본 히비야(北谷) 공원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행사를 거행, 주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주일간 구류 처분을 받고 유치장을 다녀왔다.
 
[[1920년]] [[1월]] [[유각경]] 등과 함께 여자학흥회(女子學興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나 [[1923년]] 봄 탈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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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동아일보]]의 기자 출신 [[임봉순]]과 결혼했다.<ref name="jonb189">전봉관, 《경성 자살 클럽》 (살림, 2008) 189페이지</ref> 한편 [[1930년]] 그는 자신의 동성애를 고백하여 화제가 되었다. [[소파 방정환]]이 주관하던 잡지 [[별건곤]]은 [[중외일보]] 기자로 있던 황신덕은 물론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 [[이덕요]] 등의 동성연애 경험담을 취재한 기획기사를 싣기도 했다.<ref name="jonb188">전봉관, 《경성 자살 클럽》 (살림, 2008) 188페이지</ref>
 
{{인용문2|여학생 시절에 동성연애를 안 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 역시 여러 차례 경험해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도 더러 있지요. [[숭의여학교]] 다닐 때 태천에서 온 동무하고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동무는 부모도 없는 퍽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동정에서부터 사랑이 싹튼 것 같습니다. 집에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기숙사에 있는 그 동무를 데려다가 같이 먹어야 마음이 편하고,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그 동무의 얼굴을 볼 것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빨라지며 마음이 설레였습니다.<br /> 그러다가 겨울 방학이 돼 동무가 고향으로 가게 되었을 때 2주 밖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보고싶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정거장에서 막 붙잡고 둘이서 울었지요. 목소리가 높아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한참 울고 나니까 구경꾼이 쭉 둘러섰겠지요. 동무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로는, 빠지지 않고 다니던 예배당에 혼자 가기가 너무 서운해서 몇 번이나 빠졌답니다.<ref name="jonb188"/> 이것이 나의 최초의 동성연애인가 봅니다. 그 후로도 많은 동무와 친했지만 그때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습니다.<ref name="jonb189"/>|'여류 명사의 동성연애기', [[별건곤]] [[1930년]] 11월호}}
 
그의 동성애 고백은 화제가 되었지만, [[허영숙]] 등은 자신의 동성애를 고백하면서 동성애 대상의 실명까지 거론하여 곧 묻혀졌다.
 
=== 교육 활동과 친일 활동 ===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동아일보]]》 의 기자와, [[동아일보사]]의 여성잡지 <신가정>의 기자로 재직했다. [[1940년]] [[10월 10일]]부터는 [[박찬주]]<ref>운현궁의 종주 이우의 부인</ref> 와 남편 임봉순(任鳳淳) 등의 후원으로 설립한 [[중앙여자고등학교|경성가정의숙]](京城家庭女塾) 교장을 지내면서는 [[일본 제국|일제]]의 전시 체제에 적극 협력했다. 당시 부교장은 [[박순천]]이었다. 당시 학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까지 갔던 그를 만난 [[이우]]는 흔쾌히 [[운현궁]] 근처의 부지를 그에게 기증해주었다.
 
[[File:1940 경성가정의숙 교직원 사진.jpg|thumb|200px|[[1940년]]의 [[경성가정의숙]] 교직원 사진<br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황신덕)]]
 
[[1938년]] 일제의 국방 헌금 모금운동에 참여하였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여성부문 평의원으로 친일 단체에도 가입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는 [[김활란]], [[모윤숙]], [[박인덕]] 등이 여성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황신덕은 이들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일신보]]》와 같은 친일 매체에 친일 기고문을 싣거나 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43년]] 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냈다는 의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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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휴전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북아현동에 중앙여중·고와 [[추계예술전문학교]]의 교사(校舍)를 현대식으로 신축하고, 최초로 생활지도부를 설치하여 인성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양 유일의 여학생 오케스트라를 창설하여 연례연주회를 개최하게 하였으며, 학교 교과목에 가야금과 전통 무용을 정규 교과 시간에 포함시켜 교육하고 서예와 묵화를 가르치는 등 전통 문화 교육에도 앞장섰다.
 
[[1952년]]에 여성문제연구회를 창립하였고, [[1956년]]에 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하여 전업주부의 권리 문제, 남성의 정조의 의무 위반 문제, 여성의 이혼 상담과 수속 등에 대한 문제를 제반 지원하였다. [[1961년]] 추계학원 재단을 설립하여 제1대 이사장이 되고, 추계국민학교, 추계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58년]] [[3월]] [[대한어머니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대한어머니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1958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李兌榮)과 함께 가족법개정운동(家族法改正運動)을 추진하였다. 이때 [[이태영]]으로부터 1952년 신민법(가족관계법의 전신)을 기초 입안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수하여 가족관계법 개정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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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에 취임하고, [[1971년]] 범태평양 동남아여성협회 회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75년]] [[3·1 여성동지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언니인 [[황애덕]] 외에도 기독교 계열 여성운동가인 [[고황경]], [[박순천]], [[이태영]], [[임영신]] 등과 교류하였다.
 
[[1980년]] [[12월 4일]] 추계재단 이사장직을 사퇴하였다. [[1983년]] [[11월 22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123의 31번지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새암리(현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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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키며 정부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여성문제의 해결과 여성의 사회적 입지를 구축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민족사의 산 증인으로 민족의 수난사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꿋꿋하게 설 수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민족 자존의 표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했다는 등의 평가가 있다.
 
추계학원 재단에서 간행한 중앙여자중고등학교 간행사는 "일제치하 암흑기에 창립자 추계 황신덕 선생은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서대문구 충정로 일각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37명의 신입생과 더불어 개교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과도 임시정부 입법위원으로 정부에 들어가 관선 대변인을 맡으며 초기 국정에 참여하기도 한 '민족운동에 앞장 선 여성지도자'라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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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 ====
당시 한 [[경성가정의숙]] 재학생은 자신이 당시 정신대에 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황신덕 교장이 하루는 ㄷ여고, ㅇ여고 같은 다른 학교 학생들도 정신대에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용기있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교장 선생님이 저렇게 눈물로 호소하는데, 내 한몸 희생해 학교를 구하자는 결심이 솟구치더군요." 그리고는 교장실을 찾아갔고 바로 기념사진 찍고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했다.
 
그 후 이 여학생은 [[후지코 시]]의 [[총알]] 만드는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다 해방되어 귀국했다. 그는 훗날 황신덕을 찾아갔는데, '[[1970년]] 어느해 황신덕의 병환 소식을 듣고 "선생님, 그 때 절 정신대 보내신 것 너무 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 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선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라고 하더라'고 훗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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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노영희, 〈황신덕의 일본체험과 일본선각자들과의 지적교류〉동덕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 제8집:2002년 4월호》 (동덕여자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2002년) pp.197-209&nbsp;197–209
* {{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일파 99인 2
|발행일자날짜=1993-03-01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