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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협상===
약 1개월간의 협상 끝에 막부는 미국의 개국 요구를 받아 들였다. [[3월 31일]] 페리는 약 500명의 장교와 선원들과 함께 [[무사시 국]] [[가나가와]] 근처의 요코하마 촌(현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에 상륙하여 일본 측의 환대를 받았다. 하야시 아키라를 중심으로 협상이 시작되었고, 전체 12개조에 달하는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합의를 하였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후로 200년 이상 이어온 이른바 쇄국 정책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5월 하순에 시찰을 위해 하코다테 항구에 입항하여, [[마쓰마에 번]] 가로격 마쓰마에 카게유에게 [[하코다테 항]]에 대한 동의를 요구했지만, 권한이 없다며 거절당한다. 하코다테에서 돌아온 뒤 [[이즈 국]] [[시모다 시|시모다]](현 [[시즈오카 현]] [[시모다 시]])의 료젠지(了仙寺)로 협상장을 옮겨, [[6월 17일]]에 화친 조약의 세칙 규정으로 전체 13개조로 이뤄진 〈[[시모다 조약을조약]]〉을 체결했다.
 
페리 함대는 [[6월 25일]]에 시모다를 떠나 귀로에 들른 [[류큐 왕국]]과 정식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페리는 미국에 귀국 후 이러한 항해기 ‘일본원정기’(지금도 이 사건의 일급 자료이다)를 정리해 의회에 제출했지만, 조약 체결의 중임을 완수한 지 불과 4년 후인 [[1858년]]에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후 미국은 치열한 [[남북전쟁]]에 돌입하였고, [[일본]]과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일본과 관계를 강화하고,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