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근 (187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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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력=중추원 참의
|}}
'''조성근'''(趙性根, [[1876년]] [[음력 3월 12일]] ~ [[1938년]] 양력 [[5월 15일]])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무관 군인(武官 軍人)으로, 아명(兒名)은 '''조희범'''(趙羲範)이다. [[일본군]] 장성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그는 농화학자 [[조백현]](趙伯顯)의 아버지이며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의 장인이다.<ref> {{뉴스 인용
|저자=조남준
|url=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210100046&catecode=F&cpage=1
|제목= 人物사전 趙南俊의 名門家 이야기 /斗溪 李丙燾와 학자 인맥
|출판사=월간조선
|작성일자날짜=2002-10-01
|확인일자=2008-03-28
}} </ref>
 
== 생애 ==
=== 조선 후기 ===
원적지는 [[한성부]]이다. [[1893년]]에 [[과거 (조선)|무과]]에 급제하여 훈련대에서 근무하다가 [[1895년]]에 관비유학을 명 받아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계급은 부위였다. 일본으로 간 이듬해에 귀국 명령이 떨어졌으나, 조성근은 명령에 불복종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1897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당초 징계를 내렸다가 이를 취소했다.
 
대한제국 군대의 부위로 재임용된 조성근은 다시 일본 유학을 다녀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관 등으로 근무했다. [[1900년]]에는 육군 정위로 승진했고,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접대위원을 맡았다. 1904년에 보병 참령, [[1905년]]에는 보병 부령이 되었으며, 육군연성학교 교관을 지냈다. [[1906년]]에는 [[의친왕]]을 수행하여 일본으로 가서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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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주차군사령부]] 소속을 명 받았다. [[1920년]]에 육군 소장, [[1928년]]에는 중장에 올랐다. [[1931년]] 전역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상여액 1,840원과 퇴직특별사금과 수당액으로 11,971원이라는 거액을 받았다.
 
은퇴한 뒤에도 각종 관변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만주 사변]]이 발생하자 일본군의 [[중국]] 침략을 옹호했으며, [[1931년]] 말에는 만몽재주동포협의회라는 단체를 설립해 위원장을 맡았다. [[1933년]]에 [[군국주의]] 성격이 강한 경성국방의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34년]]에는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하여 곧 있을 중국 침략에 이념적으로 대비한 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의 준비위원, [[1937년]]에는 [[중일 전쟁]] 지원을 위한 여성 단체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을 맡았다.
 
[[1932년]]에 [[이봉창]]이 [[히로히토]]를 겨냥해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곧바로 여러 유력 인사들과 회합을 갖고 일본 내각 및 [[조선총독부]]에 사죄의 의사를 표시한 뒤 자체 근신하기로 결의한 일도 있다. [[1936년]]에는 [[최린]]이 주도하여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해달라는 운동을 벌였을 때 앞장서 발기인이 되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징병제와 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공개적으로 환영하며 감격해 하는 등 병력 동원에 적극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