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체 베아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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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토가 촬영한 [[제2차 아편 전쟁]]의 사진은 군사 작전의 전개에 따라 순차적 사진을 찍은 최초의 사례였다. 다구포대 사진은 그 상징적인 사례였다. 사진에는 차례로, 포대에 접근하여 외벽과 요새에 대한 포격과 마지막으로 중국인의 시체를 포함한 파괴된 요새 내부가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진이 순서대로 촬영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시체를 정리되기 전에 촬영한 다음 터렛 내부와 외부를 촬영하였다. 앨범은 실제 전투를 재현할 수 있도록 정렬되어 있었다.
 
베아토가 촬영한 중국인의 시체(영국-프랑스군 군인의 시체는 촬영하지 않았음)와 그 재현 방법으로 그의 보도 사진에 대한 이데올로기를[[이데올로기]]를 엿볼 수 있다. 이 작전에 종군한 [[데이비드 F. 레니]] 박사는 이렇게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나는

{{인용문2|나는 서쪽 성벽을 돌며 걸었다. 거기에는그곳에는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북서 방향으로는 대포의 주변에 13명이 엉켜 쓰러져 있었다. 베아토가 거기에 있었지만,있었다. 몹시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을 ‘아름답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사진에 의해 그것이 영원히 기억될 때까지 방해를 하지 않도록 요구했다...}}

촬영된 사진은 영국 제국주의와 군사적 승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영국에서 베아토의 사진은 제2차 아편 전쟁과 다른 식민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대중에게 동양의 문화를 알렸다.
 
===이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