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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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eremony inaugurating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JPG|thumb|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1948년 8월 15일)]]
[[File:정부수립 선포에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 시민들.jpg|thumb|정부수립 선포에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 시민들(1948년 8월 15일)]]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무소속<ref>당시엔 정당이 정치를 위해 있는 게 아닌 좌우익을 선전하고 다른 한쪽을 타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ref> 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상세한 것은 [[대한민국 제헌국회]] 참조).
 
이승만은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았으나, 초대 내각에 한민당 출신을 기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민당 소속 정치인들은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는 [[의원 내각제|의원내각제]]를 지지하게 되었다. 한편 이승만은 통치기간 내내, 행정부의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추가 조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독재적인 권력을 휘둘렀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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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휴전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한국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독재 정치가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1953년]]에는 [[서울특별시|서울]]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66페이지</ref> [[1954년]] [[5월 31일]],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이 장악한 [[대한민국 제3대 국회|3대 국회]]가 개원하였고, [[11월 27일]] 사사오입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였다(→[[사사오입 개헌]]). 또한 이때, 국무총리제가 폐지되었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ref name="강준만">{{서적 인용 |성= |이름= |저자고리= |공저자= |저자=강준만 |제목=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3권 |꺾쇠표=예|연도=2004년 |출판사=인물과사상사 |위치= |페이지=13쪽 |id= }}</ref><ref>{{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제목=청산하지 못한 역사 1|날짜=1994-03-01 |출판사=청년사|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7278-312-1|꺾쇠표=예|장=김창룡, 일제관동군헌병에서 대한민국특무부대장까지 (김혜진)|페이지 = 194쪽}}</ref>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후 1956년 5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1956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 후보가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여당인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은 서로 유세를 하는 도중에 민주당 초대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병사했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 후보를 마음대로 못바꿨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인 장면만 내세웠다.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에는 야당 후보인 장면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더 큰 권력을 원했고, 이기붕 역시 그러했다. 또한,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이 선전하여 매우 거센 저항에 휩싸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저항을 타개해 나갔다. 이로써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은 1959년 간첩죄로 사형당한다.
 
[[1957년]] 1월 이승만은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다.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0월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