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전기의 교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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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도레(Isidore of Seville)는 ‘이단보다는 차라리 [[문법]]이 더 건전하다.’라고 말하였다. [[수사 (기독교)|수도사]]는 무지해도 좋지만, 대중 사이에 퍼져있는 그릇된 믿음을 다루어야 하는 [[성직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성직자의 교육용으로, 또 학생들이 원전을 직접 읽지 않고도 ‘위험한’ 지식에 접할 수 있도록 하려의 취지에서, 이시도레는 이교도 작가와 [[기독교]] 작가를 통틀어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기원(''Etymologies'')》이라는 20권짜리 백과사전으로 요약 편찬하였다. 처음 세 권은 7[[자유과|자유교과]]의 내용을 다루며, 그 중 문법에 대한 것은 한 권 전체를 차지한다. 넷째 권부터 의학과 도서관 문제 등을 비롯한 세속적, 종교적 경험의 모든 측면을 다양한 주제로 다루어 나가다가 마지막 20째 권은 육류와 음료, 공구와 가구를 다루면서 끝을 맺는다. 이 책의 내용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예컨대 [[천문학]]에 대한 부분에는 ‘[[태양]]은 [[달]]보다 크고, [[지구]]보다 크다’는 말이 기술되어있다. 이것은 이 책에 기술된 ‘[[과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막연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수도원]]과 [[수사 (기독교)|수도사]]들이 학문을 등한시 한 것은 [[중세]] 전기 전체(암흑시대)에 해당된다. 따라서 수도원이 학문의 본산으로서의 기능을 하며 학문 연구와 전파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주장은 기각될 수밖에 없다.<ref>《서양교육사》, 윌리엄 보이드 저, 유한구 외 2인 역, 교육과학사, 2008., 153페이지</ref> 수도원 중에는 학문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곳이 많이 있었으며, 학문과 문화가 뛰어났다는 수도원에서도 교육받은 수도사들은 대체로 소수 집단에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교육이라는 것도 대체로 [[기독교|종교]]에 관련된 내용에 국한되었으며, 그 대상은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고자 하는 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 학자들<ref>W.H. Stevenson, H. Sweet, G.F. Browne 등</ref> 은 수도원에 두 종류의 학교가 부설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수도원 내의 수도사 지망생을 위한 학교인 ‘내실(內室)’과 수도원 규칙상 내실에 출입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내실 밖의 건물인 ‘외실(外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은 성 골 대수도원과 같은 극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기초로 하여 일반화한 결론에 불과하다<ref>Bernardete, 1994.</ref><ref>Soble. A., 1989.</ref>. 성 골 대수도원의 경우에는 [[아일랜드]]의 영향을 받아 내실과 외실이 존재했다. 그러나 일반적 경우에는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신참 수도사와 수도원에 희사(喜捨)된 소년들에 한정되었다. 또한, 수도원의 규율에 의해 한 명의 수도사가 두 명의 신참 수도사를 항상 감독하도록 배치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수도원에서 공부한 사람은 매우 적었으며, 규모가 가장 큰 수도원에서도 10인을 넘기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 아일랜드의 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