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대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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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세조]] 12년(1466년) 당시 세자이던 아버지 [[조선 예종|예종]](睿宗)과 세자의 종5품 후궁인 소훈(昭訓) 한씨([[안순왕후]])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이씨(全州 李氏)]]다. 예종의 세자빈이던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는 [[인성대군]] 이분(李糞)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었고, 뒤이어 입궐한 소훈 한씨는 세자의 후궁이었으나 빈의 공상(供上)과 예로 대우받았다. 이복형 인성대군이 세조 9년(1463년) 3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예종 즉위년(1468년)에 원자로 책봉되었다.
 
예종 1년([[1469년]]) 아버지 예종이 임종할 당시, 왕위승계 1순위였으나 나이가 4세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조모 [[정희왕후]]가 백부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차남이자 대군의 종형인 [[조선 성종|자을산군]] 이혈(성종)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승계에서 밀려났다. 성종 1년(1470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 봉해졌다. 봉작을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으나, 직계를 대접한다는 방계의 명분이 컸다.
 
성종 5년(1474년) 증조부 [[조선 세종|세종]]의 적7남인 종조부 [[평원대군]] 임(琳)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평원대군은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다. 이러한 조처는 [[조선 성종|성종]] 초기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한명회]](韓明澮)의 신권 강화에 맞서,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왕실 종친을 보호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