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남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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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수(漢水) 유역과 사천성은 [[서위 (북조)|서위]]를 이은 [[북주]]에게 빼앗겼고, 거기에 양자강 중하류를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사실상 양나라 때에 비해 영토가 크게 축소하여 남조 왕조 중 가장 국력이 약소했다.
 
[[진패선]]은 왕승변의 부장과 강남의 토호의 반란을 평정하다 죽고, 형 시흥왕 진도담의 아들 [[남조 진 문제|문제]]가 제위를 물려받아 영주를 확보하고, [[북주]]를 비롯한 북제, 후량과 대치했다. 문제(文帝)는 내정에 전념하여 국내를 안정시켰다.
 
문제의 아들 임해왕 때 북주, 후량과 내통한 [[화교의 난]]을 평정했으나, 실권을 장악한 4대 [[진욱|선제]](宣帝)가 그를 폐위하고 즉위하여 국력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575년]] 명장 [[오명철]](吳明徹)을 시켜 북제를 공격해, 숙적 [[왕림]](王琳)을 죽이고 수양을 빼앗아 강북으로까지 영토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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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는 남조 귀족제가 [[후경의 난]]을 거치며 해체되어 무제 때 중서통사사인 [[채경력]]같은 한문 출신들이 군주의 뜻을 받들어 국정을 담당했다. 후주도 [[시문경]], [[심용경]] 등의 한문 출신을 측근으로 기용했기에, 국가의 주석이었던 무장 [[노광달]], [[소마가]], [[임충]] 등을 멀리했기에 문무 해체가 된 나라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다만 후주의 시대는 문화가 융성하여 문학에 [[강총]], [[서릉]] 등이 있었고, 불교도 문무 관료에게 신앙받았다. 나라가 멸망할 때 호구 50만, 인구 200만 명이었다. 이후 육조 문화에 근간을 둔 수나라, 당나라의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565년, 진나라는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신라로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 二十六年 ... 陳遣使劉思與僧明觀 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26년 ...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ref> 566년, 567년, 568년, 570년,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 二十七年...遣使於陳貢方物 (7년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ref>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 二十八年 春三月 遣使於陳貢方物 (28년 봄 3월에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ref>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 二十九年 ... 夏六月 遣使於陳貢方物 (29년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ref>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 三十一年 夏六月 遣使於陳獻方物 (31년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ref><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 三十二年 遣使於陳貢方物 (32년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ref>
 
 
 
 
== 역대 황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