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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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 중의 정치 ====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가 대거 당선되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이승만 정부는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1950년 9월 28일, 수복 후 일부 장관들의 경질에 따라 법무부 장관에 [[김준연]], 농림부 장관에 [[공진항]], 사회부 장관에 [[허정]], 문교부 장관에 [[백낙준]], 보건부 장관에 [[오한영]]이 임명되었다. 이들 중에서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과 [[장기영 (1903년)|장기영]]의 입각은 제헌국회 말기 1950년 3월 내각책임제 개헌운동 때 이들이 야당 대열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논공행상이 반영된 것이었으며, 민주국민당의 [[조병옥]]은 [[워커]] 미군 사령관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교통부의 [[김석관]] 장관은 차관 시절 전쟁의 와중에서 무기 및 병력수송의 공로와 기관차 한 대도 북한군의 손에 넘겨 주지 않은 투철한 책임의식에 대한 평가로 발탁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 연시중|제목= 한국 정당정치 실록 1권 |꺾쇠표=예 |연도= 2001|출판사=지와사랑 |위치= |id= |쪽=222}}</ref>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張勉)을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대한민국 내무부|내무]]에는 [[이순용]], [[대한민국 국방부|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ref>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436페이지</ref> [[이범석 (1900년)|이범석]]으로 하여금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을 창당케 하여,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되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참조).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는 [[1952년]] [[5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계엄|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력을 동원,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시킨 [[부산 정치 파동]]이 있었으며,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ref name="대일">[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570380 [박정희 생애&#93;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2) - (183)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이용문 (군인)|이용문]]과 [[박정희]]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ref name="대일"/> [[이용문 (군인)|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의 협조거부로 무산되었다.<ref name="대일"/> 이승만은 군부내 평안도 인맥을 지칭이 평안도 출신인 장면 전 총리와 결탁한다는 소문을 접하였고<ref name="평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870441 [박정희 생애&#93;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4) - (185)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이때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내렸으나 [[이종찬 (군인)|이종찬]] 등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들어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종찬을 해임하려 하였으나 밴플리트 등의 만류와 전황으로 무산되었다.<ref name="평안"/>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헌법 제2호|발췌개헌]]을 시도하여 개헌안이 [[1952년]] [[7월 4일]] 국회에서 통과되고 [[7월 7일]] 공포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냈다. 이로써 대통령 선거 방법을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1952년 [[8월 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후보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부통령 선거에서는 개헌의 1등 공신인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의 지도자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ref>1952년 8·5정부통령~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 안희수, 〈서론:정당의 형성이론과 한국정당의 발전과정〉,안희수 편저,《한국정당정치론》(나남, 1995),59쪽.</ref>([[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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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휴전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한국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독재 정치가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1953년]]에는 [[서울특별시|서울]]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66페이지</ref> [[1954년]] [[5월 31일]],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이 장악한 [[대한민국 제3대 국회|3대 국회]]가 개원하였고, [[11월 27일]] 사사오입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였다(→[[사사오입 개헌]]). 또한 이때, 국무총리제가 폐지되었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ref name="강준만">{{서적 인용 |성= |이름= |저자고리= |저자=강준만 |제목=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3권 |꺾쇠표=예|연도=2004년 |출판사=인물과사상사 |위치= |페이지=13쪽 |id= }}</ref><ref>{{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제목=청산하지 못한 역사 1|날짜=1994-03-01 |출판사=청년사|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7278-312-1|꺾쇠표=예|장=김창룡, 일제관동군헌병에서 대한민국특무부대장까지 (김혜진)|페이지 = 194쪽}}</ref>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후 1956년 5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1956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 후보가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여당인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은 서로 유세를 하는 도중에 민주당 초대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병사했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 후보를 마음대로 못바꿨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인 장면만 내세웠다.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에는 야당 후보인 장면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더 큰 권력을 원했고, 이기붕 역시 그러했다. 또한,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이 선전하여 매우 거센 저항에 휩싸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저항을 타개해 나갔다. 이로써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은 1959년 간첩죄로 사형당한다.
 
[[1957년]] 1월 이승만은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다.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0월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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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은 [[한국 전쟁]]에서 국제연합군을 주도한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는 등 호의적인 반면에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을 상당히 불신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1949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 한국대사 [[장면]]에게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한일 병합 조약|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대한민국|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ref name="유264">유영익 외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64페이지</ref> [[1940년대]]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미국 또한 이승만을 불신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승만이 언제 어떤 돌출행동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경계의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닉슨]] 미국 부통령이 1953년 11월 13일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한국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에는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ref>{{서적 인용 |저자= 온창일 |제목=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꺾쇠표=예 |장=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연도= 2000년 |출판사= 백산서당 |쪽=400~401}}</ref> [[한국 전쟁]] 휴전 이후,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깊이 인식하면고, 양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체결, 1954년 11월 17일 발효),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양국 간의 정치적·군사적 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또한 전후에도 [[주한미군]]이 주둔하여 안보를 다지고 경제원조를 강화했으며 미국은 전후복구사업 및 경제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이 시기의 한국의 안보외교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이를 보완하고 있는 유엔참전 16개국 선언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ref group="주해">여기에 후일, '박·닉슨' 공동성명이 추가된다.</ref>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목적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즉 첫째,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의 재발을 방지한다는 것과 둘째, 미국은 한국의 안보에 대한 관심을 공식조약의 형태로 표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 3조에 명시된 '헌법적 절차에 의한' 출병(出兵)이란 구절은 한·미간의 관계에 상당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여기에도 유엔참전 16개국의 선언도 점점 그 효력에 있어서 의문을 야기시키는 상태에 놓여 있다. 물론 이 선언은 그 효과면에 있어서 공식조약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의 외교#갈등과 자기고립의 시기(1948∼60년)|갈등과 자기고립의 시기(1948∼60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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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49년부터 아시아 지역의 집단안보를 역설해왔다. 1953년 11월 [[중화민국]]을 방문해 [[장제스]]을 만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아시아에서 반공 전선을 구축하겠다며 다른 나라의 참여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장제스 또한 [[대한민국]]을 방문하였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비하여 중화민국을 ‘자유중국’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한중 관계는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베트남 공화국]]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고 딘 디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네루]]와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1953년 10월 인도의 수상 네루가 "한국이 휴전 조항을 무효화하려고 기도하고 있다"면서 "유엔군사령부는 한국 정부가 취하는 행동에서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바란다"고 말하자, 공보처장 [[갈홍기]]는 네루를 '소련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ref>{{서적 인용 |저자= 김흥수 |제목= 청산하지 못한 역사2: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 |장=갈홍기:이승만 정부의 충실한 이념적 대변인 |꺾쇠표= 예 |연도= 1994 |출판사= 청년사 |쪽=335 }}</ref> 제1공화국 당시에 대한민국은 [[필리핀]](1949년), [[터키]](1957년), [[타이]](1958년), [[말레이시아]](1960년 2월)와도 수교하였다.
 
=== 대서유럽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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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임종국
|기타=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제목=실록 친일파|날짜=1991-02-01
|꺾쇠표=예
|날짜=1991-02-01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