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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일찍 여의자, 처자를 버리고 원녕사(元寧寺)를 지어 [[고골관]](古骨觀)을 닦았다.<ref name="글로벌-자장"/> 이때 선덕여왕이 보댕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636년]](선덕여왕 5년) 왕명으로 제자 [[승실]] 등 10여 명과 당의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참알하고 가사와 사리를 받고, 불도를 닦았다.<ref name="글로벌-자장"/>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643년]](선덕여왕 12년) 장경 1부와 불구를 가지고 돌아왔다.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서 《대승론》{{.cw}}《보살계본》 등을 강론하였다.<ref name="글로벌-자장"/> 그 후 [[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일체를 주관하였다.<ref name="글로벌-자장"/> 또한 [[황룡사 9층 목탑]]의 창건을 건의하여<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유사]] | 저자= [[일연]] |꺾쇠표 =예|연도= 1281 |장= [[:s:삼국유사/탑상/황룡사9층탑|탑상 - 황룡사9층탑]] |인용문=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將 唐 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以建塔之事聞於上(정관 17년 계묘 16일에 좡 황제가 하사한 경전·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여 탑을 건립하는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ref> [[645년]]에 완성하였으며,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탑을 세웠고,<ref name="글로벌-자장"/>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하였다. 이어 [[650년]] [[진덕여왕]] 때 당의 연호 사용을 건의하여<ref name="글로벌-자장"/> 실시하게 하였다.
 
만년에는 강릉군에 수다사를 짓고, 후에 태백산에 석남원(정암사)을 세워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아미타경의기》{{.c}}《출관행법》{{.c}}《제경계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