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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수'''(池龍壽, [[1313년]]? ~ ?)는 [[고려]] 말기의 무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충주 지씨|충주(忠州)]], 자는 하성(河聲), 호는 월송(月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충주 지씨]] 16세손이며, 할아버지는 문하시랑(門下侍郞) [[지원부]](池元夫), 아버지는 시중 평장사(侍中平章事) [[지환]](池桓)이다.<ref> [http://www.chungjuji.org/imgs/introduction3.jpg 충주지씨 분파도] </ref> 외손자는 [[조선 세종(世宗)]][[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崔萬理)이다.
 
== 생애 ==
[[고려]] [[충목왕]] 때 현릉직(顯陵直)으로현릉직으로 보임되었다. [[공민왕(恭愍王)]][[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안우]](安祐)를 도와 경성(京城)[[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이듬해 1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고,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되었다가,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옮겼으며,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안우경(安遇慶)]] 등과 함께 덕흥군(德興君)의 군대를 격퇴한 공으로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더하여 하사받았다. 이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임명되었다가 거듭 승진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으며, 다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제수 받았다.
 
[[1365년]](공민왕 14) 밀직사(密直司), 지도첨의(知都僉議), 상원수(上元帥)가상원수가 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로 교동에 침입한 왜구(倭寇)를왜구를 격파하였다. [[1367년]] 서북면 도순문사가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 서북면 상원수(上元帥)평양윤[[평양]]윤(平壤尹)이 되었다. [[1370년]] 8월 원나라에서[[원나라]]에서 평장사(平章事)를평장사를 지낸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김바얀]][金伯顔] 등과 함께 동녕부(東寧府)를동녕부를 거점으로 변경에 침입하자, 왕이공민왕이 상원수 지용수(池龍壽), 부원수 [[양백안]](楊伯顔), 안주상만호 [[임견미]](林堅味), [[이성계]](李成桂)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ref>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29권 공민왕 4(恭愍王四) </ref> 이때에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에압록강에 목교(木橋)를 만들어 3일간을 계속해서 장병들을 도강(渡江)시키니 3년간 계속되는 가뭄으로 찌는 듯한 폭염에 장병들은 비지땀을 흘리었다. 다 건너고 나니 뇌우(雷雨)가뇌우가 갑자기 일어났다. 모두 두려워하자 병마사(兵馬使) 이구(李玖)가 말하기를, “용(龍)이 움직이는 데는 반드시 뇌우(雷雨)가 있는데, 이제 상원수(上元帥)가상원수가 그 이름이 용자(龍字)인데 도강일(渡江日)에 뇌우(雷雨)가 있으니 승조(勝兆)다.” 라고 하니, 모두들 다소 안심하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니 장병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북방(北方)에 이르는 곳마다 적을 닥치는대로 섬멸하니 왕이공민왕이 예언한대로예언한 대로 이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고 개선하였다. 왕은 그를 하늘이 낸 장수라 하였다. 그 해 벼슬은 문하시중 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평장사(平章事)를평장사를 역임하였고, 충무공(忠武公)에 봉해졌다.<ref>고려사 권114, 열전27 </ref>
 
==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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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313년 태어남]]
[[분류:몰년 미상]]
[[분류:14세기 한국 사람]]
[[분류:고려의 무신]]
[[분류:고려의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