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다 스나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8번째 줄:
1968년, 모리 기요시(森淸)의 죽음을 받아 모리파인 춘추회(春秋會) 회장에 취임해 소노다파(園田派)를 이끌었다. 이 무렵부터 [[후쿠다 다케오]]를 전면 지지, 1972년 각복결전(角福決戦)의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 후쿠다를 지원했다. 총재 선거 후, 소노다파를 해산하여 후쿠다파에 들어가 회장 대행을 지냈다. 1976년, 반(反) 미키(三木) 연합에 의한 그룹 거당협(挙党協)의 후쿠다파 대표로 '미키 끌어내리기(三木おろし)'의 최전선에 섰다. 그 활약이 있어서 [[후쿠다 내각]]에선 염원이었던 [[내각관방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종래 후쿠다파 요인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해당 파벌의 '프린스' [[아베 신타로]]의 관방장관 취임은 빠질 수 없어 방계인 소노다는 개조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사실상 좌천당했다. 소노다 본인은 관방장관 유임을 희망했기 때문에 결국 이 사건으로 후쿠다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어 갔다.
적극적인 대중(對中)관계 개선론자였던 소노다는 외무대신으로서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해 중일 양국간의 공식적인 전쟁 상태를 완전히 종결지었고, 세계 각지를 순방해 전방위 외교를 전개하는데 주력했다. [[제1차 오히라 내각]]에서도 외상으로 유임되었으며,
== 관련 항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