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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다는 1913년 [[구마모토 현]]에서 현(縣) 의회 의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의 지망에 따라 오사카 치과 의학 전문 학교(지금의 [[오사카 치과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업에는 열의를 보이지 않은 채 징병으로 중퇴하였다. 1935년, 현역으로 육군 보병 제13연대에 입대, 간부 후보생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고향에서 소학교 조교로 채용되었다가, 만주로 건너가 1937년 봄 본계호 매철공사(本渓湖煤鉄公司)에 입사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 제13연대에 재입대하여 화중(華中) 방면 출정 후 독립 혼성 제11여단 참모부부로 옮겼으며, 1940년 중위로 진급했다. 1943년, 대위로 진급하여 공수부대인 정진(挺進) 제1연대에 배속되었고, [[마리아나 제도]]의 검호 작전(剣号作戦)에 부대 지휘관으로 참가, 1945년 8월 치토세 비행장에서 [[가미카제]] 특공에 동원될 예정이었으나, 종전으로 소집이 해제되었다.
 
1947년,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되어, 이후 통산 15번 당선되었고, 민주당 야당파로서 기타무라 도쿠타로(北村徳太郎),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과 행동을 같이하였다. 동향 구마모토 출신의 오아사 타다오(大麻唯男)에게 사숙, 개진당과 일본 민주당을 거쳐서 [[자유민주당]] 창당 후 [[고노 이치로]](河野一郞)를 보필하였고, [[하토야마 내각]]에서 외무 정무차관으로 재직했다.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보수 본류 정권하에선 소외를 면치 못했지만, 1965년부터 중의원 부의장으로 건국 기념일 제정에 진력한데다, 정계 입문 이래 장기간 각료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이 참작된 가운데 1967년,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에 후생대신으로 기용되어 입각했다. 현직 후생대신으로선 처음으로 [[미나마타 시]]를 직접 방문해 [[미나마타 병]]의 피해자들에게 사죄했으며, 미나마타병을미나마타 병을 [[공해 (환경)|공해]]로 인정하였다.
 
1968년, 모리 기요시(森淸)의 죽음을 받아 모리파인 춘추회(春秋會) 회장에 취임해 소노다파(園田派)를 이끌었다. 이 무렵부터 [[후쿠다 다케오]]를 전면 지지, 1972년 각복결전(角福決戦)의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 후쿠다를 지원했다. 총재 선거 후, 소노다파를 해산하여 후쿠다파에 들어가 회장 대행을 지냈다. 1976년, 반(反) 미키(三木) 연합에 의한 그룹 거당협(挙党協)의 후쿠다파 대표로 '미키 끌어내리기(三木おろし)'의 최전선에 섰다. 그 활약이 있어서 [[후쿠다 내각]]에선 염원이었던 [[내각관방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종래 후쿠다파 요인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해당 파벌의 '프린스' [[아베 신타로]]의 관방장관 취임은 빠질 수 없어 방계인 소노다는 개조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사실상 좌천당했다. 소노다 본인은 관방장관 유임을 희망했기 때문에 결국 이 사건으로 후쿠다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