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구치 기이치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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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때 [[기후 현]] [[오오타니 시]]의 히구치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거쳐 고급군인이 되고 나서는 주로 [[만주]]및 [[러시아]] 방면의 부서에서 근무하였다.
하얼빈 특무기관장(소장)으로 재직했던 1938년에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 온 2만명의 [[유대인]]에 대하여 부하인 [[야스에 노리히로]] 대좌와 함께 제반편의를 제공하고 이들의 [[만주국]] 및 [[샹하이 조계지]]로의 이동등을 도왔다. (오토볼 사건)
그후, [[삿포로]]에 사령부를 둔 북부군(후에 북방군,제5방면군으로 개칭)사령관으로서 북동태평양육군작전을 지휘하였다. [[애투 섬]] 옥쇄,[[키스카 섬]] 패퇴, 패전후의 [[슈무슈 섬]], [[사할린 섬]]에서의 전투를 지휘하여 슈무슈 섬에서는 [[소련군]] 치시마 침공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함으로서, 홋카이도를 소련군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냈다. (사할린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여 소련군에게 점령되었다) 이 일로, [[스탈린]]은 히구치를 [[전범]]으로 지목하였다. [[세계 유대인 협회]]는 나중에 이런 움직임을 포착한 후, 유대인 커뮤니티을 이용하여 로비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점령후 소련측의 전범인도요구를 거부하여, 히구치의 신병을 보호하였다.
 
전후, 부하인 야스에 노리히로와 더불어 이스라엘 건국의 공로자로서 황금의 비에 이름이 새겨지고 공적을 치하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