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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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 1623년 9월부터 1649년 5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623년 9월부터 1647년 4월까지 친정하였고 한때 1624년 2월 이복 숙부 흥안군 이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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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조선국왕일람|조선의 제17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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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 [[1619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ref><조선왕조실록 효종 대왕 행장> 모비(母妃) 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인데, 향교동(鄕校洞)의 잠저(潛邸)에서 기미년 5월 22일 해시(亥時)에 왕을 낳았다.</ref> ~ [[1659년]] [[6월 23일]] ([[음력 5월 4일]]), 재위: [[1649년]] ~ [[1659년]])은 [[조선]]의 제17대 [[왕|임금]]이다. [[조선 인조|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왕자로 책봉되고 1626년 봉림대군의 작위를 받았다. [[1635년]] 대군사부로 임명된 [[송시열]], [[윤선도]], [[송준길]] 등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1637년]] [[정축하성]] 이후 [[소현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8년만에 귀국했다. 그 뒤 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으면서 부왕 인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7년]]부터는 부왕 [[조선 인조|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고 [[1649년]] [[5월]] 부왕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척신들과 [[서인]] [[인조 반정|반정]] 공신들을 견제하면서 [[서인]] 산림 세력을 등용, [[김집 (1574년)|김집]], [[김상헌]], [[안방준 (1573년)|안방준]] 등과 그들의 문인들을 적극 발탁하였다. 이후 북벌론을 계획하였으며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을 시행하였으나 재위 10년만에 과로로 의원의 진료를 받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효종의 사망 당시 계모인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었는데, 그의 죽음은 [[예송 논쟁]]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휘]]는 이호(李淏),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자 (이름)|자]]는 정연(靜淵), [[호 (이름)|호]]는 죽오(竹梧)이며, 사후 시호는 '''효종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효종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孝宗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선왕'''(忠宣王)이다. [[송시열]], [[윤선도]], [[송준길]]의 문인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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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조선의 군인]]
[[분류:조선의 성리학자]]
[[분류:한국의 섭정]]
[[분류:병자호란 관련자]]
[[분류:정묘호란 관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