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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11월]] [[대한제국]] 국군 [[헌병]]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9월]] 다시 [[경무사]]에 임명된 뒤 [[대한제국]] 육군 참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 다시 [[헌병]] [[사령관]]에 재임명되었다.
 
[[1903년]] [[3월]] 대한제국 원수부 회계국 총장을 거쳐, 그해 [[5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副將)이 되어 [[이완용]] 내각(李完用內閣)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그해 [[7월]] 군부대신으로 원수부 군무국 총장을 겸임하고, [[11월]] 행[[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그 뒤 호위대 총관을 거쳐 [[1904년]] [[2월]] 원수부 검사국 총장에 임명되었다. [[1906년]] [[돈령원]][[판사]](敦寧院判事)에 임명된 뒤 태의원경(太醫院卿)이 되어 [[훈3등]] 태극장을[[태극장]]을 받았으며, 그해 [[9월]] 다시 [[돈령원]][[판사]]에 올라 [[칙임관]] 1등이 되었다.
 
[[1907년]] [[9월]] 군대 해산으로 육군 부장으로 퇴역하였다.
 
[[1908년]](융희 2년) [[2월]] [[한국통감]]부가 조선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해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하에 조직된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쓰러져 활동하지 못하고 집에 누워 있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그는 병석에 누워 혼수상태였는데, 이후 9년간 병석에 누워 있다가 [[1919년]]에 사망한다.
 
=== 혼수상태와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