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사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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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0월 메이지 4년, [[미야코 섬]]에서 [[슈리]]에 공물을 수송하고 귀환길에 올랐던 류큐 어용 선박이 [[태풍]]으로 인해 조난을 당했다. 승무원은 표류를 하다가 대만 남부에 도착했다. 배에는 관리와 뱃사공, 승무원 총 69명이 타고 있었다. 표착한 승무원 66명(3명 익사)은 원주민(현재 타이완 원주민 [[파이완 족]])에게 구조를 요청했지만, 반대로 마을에 납치되었다.
[[12월 17일]], 원주민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자 조난자들은 마을에서 도주를 했고, 원주민들은 도망자를 적으로 간주하여 차례로 54명을 참수하는 ‘[[미야코 섬 조난 사건]]’을 일으킨다. 생존자 12명은 [[한족]] 이민자에게 구조되었고, [[대만부]]의 보호를 받으며 [[복건성]]의 [[복주]]를 통해 [[미야코 섬]]으로 돌려보내졌다.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에게 사건의 배상 등을 요구했지만, 청나라 정부는 관할 외 지역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부했다. 이듬해 1872년 류큐를 관할하고 있던 [[가고시마 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는
==개전==
[[미야코 섬]] 주민의 대만 실종을 알게 된 [[청나라]] [[샤먼]] 주재 미국 총영사 [[샤를 르 장드르]]는 주일 미국 공사 [[찰스 드롱]]을 통해 “야만인을 징벌해야 한다”며 [[일본]] [[외무성]]을 옹호했다. 외무경인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드롱의 중개를 통해 샤를 르 장드르와 회담을 가졌고, 내무경인 [[오쿠보 도시미치]]도 르 장드르의 의견에 주목하여 르 장드르는 고문으로 외무성에 고용되게 되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조선]] 출병을 둘러싼 [[정한론]] 등으로 갈등이 있었고, 가바 야마 스케노리와 [[가고시마 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도 [[사쓰마 번]]의 대만 출병을 건의했다. 이러한 강경 의견의 배경에는 [[폐번치현]]에 의해 실직한 40만명에서 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족들의 불만의 해소할 배출구를 찾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1873년]] 특명
[[메이지 6년 정변]]에서 [[메이지 천황]]의 칙령은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이유로 한 ‘정한’의 연기일 뿐이어서 러시아와 국경이 확정되면 [[정한론|정한파]]의 요구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았다. 정변으로 하야한 소에지마 대신 외교를 담당하게 된 오쿠보로서는 조선보다 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대만 출병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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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8명, 전상 25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장기 주둔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말라리아 등의 감염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출정한 군인, 군속 5,990여 명 중 환자 수는
[[1871년]], [[병부성]]은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되었고, 군의관학교는 육군성에 속했으며, 군의료 책임자는 마쓰모토 준이었다. 타이완 출병 당시 군의관부 창립부터 기간이 짧아 경험이 부족했지만 총력을 기울여 사태를 맞았다. 출정군의 의무 책임자는 쿠와타 고오헤 이등군의관정(소령 상당), 부대의 의료관은 미야모토 마사히로 군의(대위 상당)였다. 그 외에도 24명의 의무관이 종군을 하고 있었다. 의무관들은 모두 분투했지만, 극악의 환경과 맹렬한 전염병으로 와병하는 사람이 많았고, 사이고 도독으로부터 병사에게 약만 처방해달라고 요청을 받았다. 의관의 대부분은 [[한의사]]로 열대 질병 치료에 전혀 경험이 없었다. 그들은 교대로 22명이 도착했기 때문에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궁내성에서 외국인 의사가 파견되었다. 독일 출신의 구스타프 센베르크(Dr. Gustav Schoenberg)는 [[도쿄대학]] 의학부의 전신에 해당하는 대학교에 속한 외국인 의사 레오폴트 뮐러를 천거했지만 능력이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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