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4번째 줄:
향리 출신의 이들 사대부는 곧 재향 지주(在鄕地主)이기도 하였다. 지방의 중소 지주인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를 거쳐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나서 향리(鄕里)에서의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들의 사회적 진출은 드디어 고려의 정치적 대세를 변화시켰던 것이다.<ref name="사대부"/>
 
==너지고 원간섭기에 들면서 신진세력은 원나라를 통해 주자학을 도입하구, 보급하는시도할 때 그 을 받기도 했지만, 특히 [[공민왕]]의 개혁 때 형성된 개혁세력은 조선건국세력으로 이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가 토지를 직접 경영했기 때문에 생산력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고
=== 신진사대부 등장 ===
신진사대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시기는 [[고려말]]이었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간섭기에 들면서 신진세력은 원나라를 통해 주자학을 도입하고 국학을 중심으로 이를 연구, 보급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가 충선왕·충목왕·공민왕 등이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권문세족을 누르고 개혁을 시도할 때 그 측근세력으로 개혁에 참여하면서, 권문세족과 대립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권문세족]]에 의해 개혁이 저지되어 많은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특히 [[공민왕]]의 개혁 때 형성된 개혁세력은 조선건국세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들은 지방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농장을 확대해가는 권문세족과는 이해관계가 대립되었다. 또 권문세족이 부재지주였던 데 비해 자신의 토지를 직접 경영했기 때문에 생산력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고려 말 중국의 강남농법의 도입으로 농업기술의 급진적 발전을 가져온 것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신진사대부가 권문세족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데 이론적 무기로 사용한 것은 [[성리학]]이었다. 이때 수용된 [[성리학]]은 [[원나라]]에서 한차례 여과된 것으로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신진사대부들은 실천윤리를 중심으로 의리론·명분론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에 입각해 가장 먼저 공격했던 것은 불교의 비현실성과 승려들의 무위도식이었는데, 불교에 대한 공격은 불교와 일체가 되는 당시 권문세족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 이렇게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권문세족과는 사회적·경제적·사상적 입장을 달리했고, 고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권문세족의 기반인 정치 및 토지의 개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이후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본격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사전(私田)의 개혁과 새 왕조의 수립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로 나뉘며, 급진개혁파가 사전의 개혁을 강력히 추진, [[과전법]]을 마련하고 조선건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ref name="사대부"/>
 
=== 성리학과 주자학의 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