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수 (언론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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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934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해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입사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매일신보 통신부장(1938년 ~ 1940년)과 조사부장(1941년 ~ 1942년, 1943년 ~ 1944년), 논설위원(1943년 ~ 1944년)을 역임했으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각종 신문과 잡지에 일본의 침략 전쟁과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는 글을 발표했다.
 
[[1942년]] 1월부터 [[1944년]]까지 잡지 《조광》, 《춘추》, 《신시대》, 신문 《매일신보》 등에 징병과 징용 제도를 선전, 선동,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고,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과 강사를 역임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표한 미체포자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 주요 기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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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09년 태어남]]
[[분류:몰년 미상]]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