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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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정경부인 [[파평 윤씨]]
|자녀= [[원사웅]](아들)
|부모= 평원부원군 [[원준량]](부) <br /> [[남원 양씨]] 부인(모)
|친척= 원용(동생) <br /> 원연(동생) <br /> 원전(동생) <br /> 원사립(조카)
|생애= {{출생일|1540|2|12}} ~ {{사망일|1597|8|27}} (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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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사인 최옹이 함경북도 병사 곽흘 등의 자제의 무과 응시에 관하여 아뢰다)
 
사인(舍人) 최옹(崔翁)이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함경북도 병사 곽흘(郭屹), 평안 병사 이택(李澤), 경상우도 병사 원준량(元俊良)이 그들의 자제(子弟)를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한 일은 지금 추고(推考) 중에 있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과거 사목(科擧事目)이 문과는 상세한데, 무과는 일정한 규정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그 자제들이 군관(軍官)으로서 구례대로 응시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법을 어기고 거짓으로 응시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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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ref>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4일(신미) 1번째 기사
간원이 초수된 전라 좌수사 원균의 체차를 청하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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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왜군이 옥포 앞바다로 집결하자 원균이 직접 북을 울리며 전선을 이끌고 돌진하자, 왜군이 원균 선박에 집중하는 사이 매복해 있던 [[이순신]] 등이 일시에 힘껏 공격하여 옥포 앞바다에서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다 계산할 수 없었다. 원균은 적선 안에서 빼앗은 것으로 금칠이 된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측근에게 준 부채로, 도요토미의 친필 서명이 담긴 것이었다. 그는 곧 동생 원전(元㙉)을 보내 사로잡은 왜군 포로 몇명을 왕에게 바치니 왕이 특별히 가상하게 여겨 동생 원전에게 [[선전관]]을 제수한다.
 
원균행장에서는 5월 6일 [[이순신]], [[이억기]]와 만난 후 원균이 직접 북을 울리며 돌진, 이순신 등이 이에 따라 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원균이 적선 안에서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측근에게 준 부채였다고 기록돼 있다.
옥포 앞바다에서 원균은 왜선 30척을 침몰시켰으며, 다시 [[사천만]] 앞바다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5월 8일]] [[조선 선조|선조]]의 어가가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장(諸將)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전군(全軍)이 그의 충심에 감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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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인데도 동료인<ref name="shin338"/>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ref name="shin339">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39페이지</ref>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익]]은 [[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ref name="shin339"/>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 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ref name="shin339"/> 이는 그간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ref name="shin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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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ref>선조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12일(기묘) 1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충청 병사 원균의 추고와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박탈하도록 청하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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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음력 7월 15일]] 원균은 다시 퇴각하여 그날 저녁 온라도(溫羅島)에 도착했다. 이때 원균은 죽음을 각오할 것을 부하들에게 주문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소.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않으니 오늘의 계책으로는 다만 한 마음으로 순국(殉國)하는 것이 있을 뿐이오.<ref name="원균 행장, 김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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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 : [[원연]](元埏, [[1543년]] ~ [[1597년]], 백부 원수량의 양자로 출)
*** 동생 : 원연(元埏)
*** 동생 : 원용(元墉)
*** 동생 : 원전(元塼)
*** 동생 : 원지(元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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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용문|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겨 제수하였다.
균이 이순신의 차장(次將)이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기고서 절제(節制)를 받지 않으니 순신은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면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누차 도원수로 하여금 공죄(功罪)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균은 더욱 거침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어 하는 말이 모두 추악하였으며, 순신 또한 균이 공상(功狀)이 없음을 말하는 가운데 실상과 다른 한 조목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대부분 원균을 편들었으므로 마침내 모두 탄핵을 당했다.
상이 다시 비변사로 하여금 조정하게 하였는데, 단지 균은 체차(遞差)시켜 육장(陸將)을 삼고 순신은 병사로 죄책감을 가지고 스스로 공을 세우게 하였다. 균은 서울과 가까운 진(鎭)에 부임하여 총애받는 권신(權臣)과 결탁해 날마다 허황된 말로 순신을 헐뜯었는데, 순신은 성품이 곧고 굳세어 조정 안에서 대부분 순신을 미워하고 균을 칭찬하였으므로 명실(名實)이 도치되었다.-선수 2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2월 1일(갑진) 7번째 기사
경상 우수사 원균을 충청 절도사로 옮겨 제수하다-}}
 
2. {{인용문|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선조 163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6월 26일(신해) 2번째 기사
원균의 등급에 대해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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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윤두수(尹斗壽)가 그렇게 아뢰게 한 것이다. 】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 99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4월 2일(병진) 2번째 기사
한산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들을 징계하도록 하니, 비변사가 원균의 징계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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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용문|민정중이 말하기를 "원균이 전선을 많이 모아 바다에 침몰시키고 달아났으나, 이순신이 십여 척으로 적을 격파하였는데, 쓰인 배는 또한 모두 위급한 상황에 임하여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장차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배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또한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명하여 상의해서 변통하도록 하였다. 『숙종실록』숙종7년(1681) 5월 3일 기사}}
 
* 민정중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원균과 같은 서인이었다. 숙종 시기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간의 갈등의 골이 깊은 상태였음에도, 같은 서인인 원균을 비난하고 반대 당파 사람인 이순신을 칭송하고 있다.
 
5. {{인용문|또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자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자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영조실록』영조26년(1750) 7월 3일 기사원균이 장수가 되어서는 패전하였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어서는 승전했으니, 장수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선척(船隻:배)의 낙인(烙印)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겠습니까?『영조실록』영조29년(1753) 2월 22일 기사}}
 
*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은 원균을 패장으로 이순신은 승장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왕명으로 이순신의 업적을 기린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도록 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정조의 윤음(국왕이 관인과 인민을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문서)이 실려있다. 정조는 원균을 1등공신으로 임명하여 그를 칭송한 선조를 비판하는 위험성까지 감수하여 이순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충무공전서』는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허겁지겁 도망치다 왜군에게 붙잡히자 목숨을 구걸하다 목이 베이는 비굴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정조 집권기에 국책사업으로 이순신을 기리는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당시 정조집권기 조정은 서인계열인 노론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같은 서인인 원균이 아닌 동인 계열의 이순신을 기리는 전서를 펴냈다는 건 당시 사람들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의미있는 증거다.
 
7. {{인용문|용인의 유학 안석광이 상언 하기를, "신의 6대조 안홍국은 힘껏 싸우다가 만력 정유년 6월 19일 안골포 앞 나루에서 한 몸을 바쳤는데, 충무공전서에는 통제사 원균과 7월 15일 한산도의 군진이 무너질 때에 같이 죽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죽은 것은 같으나 싸우다가 죽은 것과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 뜻을 두었던 일이 이로 인하여 묻혀 버리고 공적이 이로 말미암아 없어졌으니, 삼가 바라건데 특명으로 충무공전서에 고쳐 기록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예조가 아뢰기를"힘껏 싸우다가 죽은 것이나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이나 죽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용맹함과 비겁함은 판이합니다. 지명과 날짜가 이처럼 서로 틀리니, 당초 책을 편집한 신하로 하여금 사적을 다시 상고해서 바로잡도록 하소서.하니 하교하기를 "내각으로 하여금 공사의 문적을 다시 고증하게 한 뒤 바로잡아야 하거든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정조실록』영조21년(1797) 2월 22일 기사}}
 
* 안흥국은 보성군수로 칠전량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손인 안석광이 자신의 조상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지, 원균과 도망치다 죽은 것이 아니라며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조상의 사적을 고쳐달라 요청했고,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내용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안석광은 자신의 조상 안흥국이 원균 같은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조정에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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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선조 71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12일(기묘) 1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충청 병사 원균의 추고와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박탈하도록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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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에 의하면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에게 위임받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오던 조선인 여성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여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 속였다. 이후 난중일기에 의하면 두번 더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인용문|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水使:원균)가 적선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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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상략)...나는 적을 만나 싸울 때 거리가 멀면 편전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을 쓰며, 육박전이 벌어지면 칼을 사용하고 칼이 부러지면 정(釘)으로 싸우니, 이기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총대장이나 된 자가 직접 나서서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하략) -난중잡록-}}
 
3. {{인용문|백사(이항복의 호)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일찍이 수군과 육군을 지휘한 여러 장수들의 공을 논하면서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 대첩과 권율의 행주 대첩이 마땅히 으뜸가는 공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뀔 수 없는 정론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원균은 다만 남에 의지해서 성공한 자이니, 감히 이순신과 공을 겨룰 수는 없다"고 하였다.백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잘못된 말을 했겠는가? 왜적이 수군을 거느리고 멀리 호남을 향해 진격해 갔을 때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계략을 짜내어 한산도에서 차단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6년 동안이나 서쪽으로 노를 저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반면 원균은 겁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스스로 전설을 모두 침몰시키고는 섬으로 도망가 숨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중으로 데려다 놓고 돈과 군량을 넉넉히 보내 주었고, 노획한 적의 머리와 포로를 원균에게 나누어주어, 원균이 군율로 다스려짐을 면하게 했을 뿐 아니라 또 상까지 받도록 했다.원균은 이토록 이순신에게 받은 은혜가 참으로 셀 수 없이 많았는데도,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품어 이순신을 해치는 데 못할 것이 없었다. 이순신이 스스로 바다의 왕(海王)을 자처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바다를 건너게 되자 은밀히 장계를 올려 이순신이 겁을 먹고 출진하지 못했다고 말하여, 이순신은 체포되어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원균이 그를 대신하였으나, 한시도 버티지 못하고 온 수군이 침몰하니, 목을 벨 죄만 있지 기록할만한 공은 없는데도 도리어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칭송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원균은 대대로 한양에서 살면서 그의 가족들이 지위 높은 대신과 인맥을 맺고 또 시국을 담당한 사람을 아첨으로 섬겨 그를 도와준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임금을 속이고 형벌과 상을 뒤엎은 것인데 백사는 ㄱ런 사실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어전에서 공을 논할 때 어찌하여 이를 아뢰어 우리 선왕(先王)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명백히 알도록 하지 않았는가? 물러 나온 뒤에 처음에는 '바뀔 수 없는 정론'이라 말하고 끝에서는 '감히 이순신과 공을 겨룰 수 없다'고 말하니, 정론이란 과연 그런 것인가? 『은봉전서』}}
 
『은봉전서』의 저자 안방준은 이항복이 더 강한 어조로 원균을 비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따지고 있다. 안방준은 경상도에서 활약한 의병장으로, 원균과 같은 당파인 서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원균과 친인척 사이였고, 현장에서 직접 활동했기에 원균에 대해 있지도 않은 험담을 지어낼 가능성은 없다.
 
4. {{인용문|원균은 나의 중부 동암공(안중홍)의 처 원씨의 친족이다. 그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중부를 찾아와 인사하고 말하기를, "나는 이 직책에 오른 것이 영광스럽지 않고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값은 것이 통쾌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부께서 "그대가 왜적을 무찌르는데 성심을 다하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더 뛰어나면 치욕을 씻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고작 이순신을 갈아치운 것으로 통쾌히 여기면 어찌 치욕을 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원균은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되면 먼 거리에서 편전과 장전을 쓰고, 가까이에서는 칼과 곤봉을 사용하면 되니 이기지 못할 까닭이 없소."라고 하였다. 중부는 웃으며 말하기를 "대장이 되어서 직접 칼과 곤봉을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원균이 돌아가자, 중부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틀렸다. 조괄과 기겁도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고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남쪽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다.『은봉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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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택당 이식(1584-1647)이 지은 시장(諡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덕수 이씨로 좌의정 이행의 현손이며 청음 김상헌과 함께 척화론(斥和論)을 펴다 심양으로 잡혀간 절신(節臣)이다. 그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한학사대가(漢學四大家)로 존경을 받았다.<ref>택당 이식은 덕수이씨로 [[이순신]]과 같은 집안 사람이다.</ref> 그는 여기서 이순신의 시호를 청하는 글에 [[이순신]]을 옹호하면서 원균을 비난하였다.
 
{{인용문|이에 앞서 원균이 배 한 척을 타고 공에게 와서 하소연하자 공이 연명으로 승첩을 아뢰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공적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을 승진시켜 통제사로 삼았던 것인데, 원균은 공의 아래에 있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이때부터 공에게 두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에 공이 항상 부드럽게 포용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은 사납게 굴고 제멋대로 화풀이를 하면서 공의 절제(節制)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ref name="taekdang">택당 이식, 이순신 시장</ref>
 
이에 공이 대사를 그르칠까 염려한 나머지 자신의 허물을 들어 인피(引避)하며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여겨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키기에 이르렀다. 원균은 쌓인 감정을 풀지 않은 채 조정의 고관들과 결탁하고는 온갖 방법으로 공을 무함하기 시작했다.<ref name="taekdang"/>}}
 
8.
* 원균은 배가 볼록하고 입은 비뚤어 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다. -달천몽유록-
*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씩을 먹으며,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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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墓)와 사당(祠堂) ===
 
* 경기도 지정 기념물제 57호(1980) - 경기 평택시 도일동 산 82
* 원릉군 원균 선무1등공신 교서(敎書) - 보물 제1133호
* 원균 무덤 옆의 애마총: 내리저수지를 정면으로 마주한 언덕배기에 있는 묘역은 널찍했다. 원균의 묘지 아랫녘 신도비 옆에 있는 작은 무덤 앞에는 애마총이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원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천리를 달려와 신발과 담뱃대를 놓고 그 자리에서 죽은 애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말 무덤이라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타던 애마(愛馬 - [[조선 선조|선조]]가 하사했음)가 장군이 전사한 뒤 유품 몇 가지와 한 쪽 팔을 물고 천리길을 달려 고향마을까지 가져온 뒤 죽었는데, 그 유품으로 묘(墓)를 썼다고 한다. {{출처|날짜=2007-5-14|그러나 이 묘는 가짜로 원균사망당시는 담배가 도입되지 않은 시기니 위에 나온 일화는 불가능하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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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태니커|b17a0061a}}
* {{두피디아|101013000778962}}
* [http://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0701/wk2007012214450237140.htm <nowiki>[</nowiki>종가기행 33<nowiki>]</nowiki> 原州 元氏 原陵君 元均(원주 원씨 원릉군 원균)] 한국일보 2007/01/22일자
* [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2,11330000,31&queryText=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 원균 선무공신교서:문화재청]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weekly/2005/05/04/200505040500013/200505040500013_2.html 원균:만고충신 勇將 역사는 왜 그를 버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