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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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성내에서는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발발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군사와 1천여 명의 의병으로서 3만 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제1차 진주성 전투라고도 하고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한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중에서도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권율]]의 [[행주산성대첩]]과 함께 3대 첩승의 하나로 꼽힌다. 일명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6월]] [[일본군]]은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10만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진공하였다. 이때 인근에 있던 [[박진]] 등의 군사가 지원했지만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함께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성이 함락되자 진주목사 [[서예원]]는 살해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의병장 [[김천일]] 부자, [[고종후]] 등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왜군은 항전에 참가한 2만~3만에 달하던 성민․피란민들도 일거에 학살하였다.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