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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신'''(白南信, [[1858년]] [[12월 19일]] ~ [[1920년]] [[3월 16일]])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일제 강점기]]의 부호(富豪)이자 [[친일파]]로 본명은 낙신(樂信), 본관은 [[수원 백씨|수원]](水原)이다. 족보에는 남신이란 이름을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동학농민운동]] 진압 이후 삼남(三南)을 맡길만 하다는 이유로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외의 기록에서는 나타난 바가 없다.
 
[[1893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1897년]]에 궁내부 영선사 주사에 임명되어 대궐에서 소용되는 물품의 구입을 담당하였고, 전주진위대의 향관을 겸하여 군량 및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1902년]]에는 궁내부 내장원의 전라도 검세관에 임명되어 탁지부에서 내장원에 외획한 결세전을 징수하여 이를 사고팔아 서울로 운송하는 일을 맡았다.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토지를 매입하거나 사채업에 이용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1905년]] 이후에는 농장형태의 농업 경영을 통해 [[전라도]]의 부호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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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에 [[전라북도]] 대표 2명 중 한사람으로 임명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본에 대해 적극적인 협조를 보였다. [[1918년]]에 일본이 시베리아로 출병했을 때 벼 4천석을 군용미로 헌납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6등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전북의 친일단체 전북자성회의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재위했을 때에는 해마다 5만 냥 상당의 부채 3만 자루를 궁으로 보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ref|a}}>황현, 《매천야록》</ref>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아들 [[백인기]]와 함께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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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references/>
#{{note|a}} 황현, 《매천야록》
 
[[분류:1858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