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바뀜

25 바이트 추가됨 ,  3년 전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국민주권; 예쁘게 바꿈
 
== 배경 ==
[[File파일:US Slave Free 1789-1861.gif|left|thumb|자유주와 노예주의 변천, 1789년-1861년]]
미국 남부에 뿌리 깊이 정착된 노예 제도의 문제는 건국 때부터 이견이 분분했었다. [[미국 헌법]]은 노예 제도가 유지되지 않았다면 비준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헌법에는 5분의 3조항이 있어 [[미국 하원]] 의원의 각주 정원수를 결정하는 근거로 주 인구에 주의 노예 인구의 5 분의 3이 가산되어 있었다. 이것은 [[노예 주]]와 [[자유 주]]의 이익의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를 확대하고 새로운 주를 자유 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노예 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노예 제도에 관한 논란은 커졌고, 한 방향으로 진행해서 권력의 취약한 균형을 언제든지 무너뜨릴 우려가 있었다. 1820년 [[미주리 타협]]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후 [[1850년 타협]]은 유사한 목적으로 행해졌지만, 나라 전체가 내란에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1854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은 [[캔자스 준주]]와 [[네브래스카 준주]]를 설립하고 미국인 개척자 땅을 개방하게 되었다. 이 법은 2개의 준주가 주로 승격할 때 노예 제도를 인정 여부를 주민들에게 결정하게 한다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미주리 타협]]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이 주민들에게 결정하게 한다는 개념은 현재 ‘주민 주권’이라는 것으로, 미국 상원 의원, 상원 영토 문제 전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스티븐 더글러스]]가 제창한 것이었다. 주민 주권은 서부와 북부의 새로운 준주에 노예 제도를 확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며, 남부 주에 양보하는 시도였다. 이 원칙은 캔자스 준주에서 ‘불법 거주자 주권’이라고 하여, [[루이스 캐스]] 상원 의원은 시행을 방해했다. 캐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데일리 유니언’에 투고한 글에서 그것을 이론적 구조를 제공함으로써 ‘주민 주권의 아버지’(''Father of Popular Sovereignty'')라는 호칭을 받았다. 또한 캐스는 184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도 지명되었다.<ref>{{cite book|last=Klunder|first=Willard Carl|title=Lewis Cass and the Politics of Moderation|url=http://books.google.com/books?id=XlQHi_dJyRUC&pg=PP1&dq=isbn=9780873385367&ei=_i8eSJTuGpjwtAPMnf3lBg&sig=oJi7Vp5R9z6B-8wJ5EDqWiVB77s#PPA2,M1|accessdate=2008-05-04|year=1996|page=168|publisher=[[Kent State University Press]]|location=Kent, OH|isbn=0-87338-536-5}}</ref>
 
== 북부와 남부의 만남 ==
[[그림파일:Bleeding Kansas Poster.jpg|thumb|1855년, [[자유주 (캔자스)|캔자스 자유주]]의 포스터.]]
[[캔자스 준주]]에 최초로 조직된 이민자들은 노예 주의 주민들, 특히 인접한 미주리 주에서 온 시민이었다. 그들은 캔자스 준주에 노예 주의 확대를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이민자들이 레번워스와 애치슨에 노예 제도 지지자들의 개척지를 설립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북부에서 온 반노예 조직, 그 중에서도 뉴잉글랜드 이민자 지원 회사가 캔자스에 수천 명의 개척자를 이동시켜, 그곳을 자유 주로 만들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1855년]] 10월 존 브라운이 노예 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캔자스 준주에 들어왔다. [[11월 21일]] ‘찰스 도우’라는 자유 주 주민이 노예 제도 지지자의 개척자에 총격을 당하자 ‘[[와카루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유일한 사망자는 ‘토마스 바버’로 자유 주 사람이었다. 그는 [[1855년]] [[12월 6일]]에 침입자의 주력이 진을 치고 있던 로렌스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1856년]] [[5월 21일]], 보더 러피안의 무리가 자유 주 로렌스 요새로 들어와, 그곳에서 자유 주 호텔을 불태우고, 2개의 신문사 사무소와 인쇄기를 파괴했으며, 주택이나 점포를 약탈하기도 했다.
 
[[File파일:Southern Chivalry.jpg|thumb|230px|[[1856년]] 미국 상원 의회에서 [[찰스 섬너]]를 폭행하는 [[프레스턴 브룩스]]]]
다음 날 [[5월 22일]] 오후, 미국 상원 회의장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민주당 하원 의원 [[프레스턴 스미스 브룩스]]가 매사추세츠 [[자유토지당]] 상원 의원 [[찰스 섬너]]를 폭행했다. 그는 지팡이로 섬머의 머리를 때렸으며, 섬너는 자신이 흘린 피로 눈이 보이지 않았으며, 쓰러져서 의식 불명이 될 때까지 지팡이에 찔렸다. 브룩스는 지팡이가 부러질 때까지 섬너를 계속 폭행했다. 다른 상원 의원 몇 사람이 섬너를 도우려고 했지만, 권총을 들고 ‘그냥 둬!’라고 외치는 로렌스 키토 하원 의원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이 사건은 그 전에 섬너가 캔자스에서 노예제 지지자의 폭력 사태를 비난한 연설에서 브룩스의 친척 의원을 모욕한데 대한 보복이었다. 섬너는 이때 머리와 목에 입은 상처로 3년간 상원 회의장에 돌아오지 못했다. 섬너는 노예제도 반대운동가들의 순교자가 되었다.
 
 
== 참고 자료 ==
* Etcheson, Nicole. ''Bleeding Kansas: Contested Liberty in the Civil War Era'' (2006)
* Goodrich, Thomas. ''War to the Knife: Bleeding Kansas, 1854-1861'' (2004)
* Malin, James C. ''John Brown and the legend of fifty-six'' (1942)
* Miner, Craig (2002). ''Kansas: The History of the Sunflower State, 1854-2000'' (ISBN 0-7006-1215-7)
 
[[분류:피의 캔자스| ]]
[[분류:국민주권]]

편집

1,160,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