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나드 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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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조지 버나드 쇼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1남 2녀 가운데 막내로 출생하였다. 정부 인사로 근무하던 그의 아버지는 곡물상으로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하였고, 그 후로 집안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687&path=|462|570|&leafId=842 조지 버나드 쇼 - 네이버 캐스트, 2012년 3월 20일]</ref>
 
모친으로부터의 영향으로 음악에 흥미를 가져서 받은 성악 레슨은 후에 연설자가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학교교육을 받았으나 성적은 거의 최하위, 다만 작문은 뛰어났으며 쇼의 흥미는 문학, 음악, 그래픽 아트 등에 있었다. 가난하여 초등학교만 나왔을 뿐이나, 사환으로 일하면서 [[음악]]과 그림을 배웠으며 [[소설]]도 썼다.
 
1871년에는 [[더블린]]의 토지 중개사무소에 근무, 십대 후반을 보냈지만 일에 대해 흥미가 없었다. 여러 신문잡지에 투고하였으며, 경제적 이유로 모친이 두 딸을 데리고 [[런던]]으로 나와 음악교사가 되자 쇼도 그들 뒤를 따라 1876년에 런던으로 나왔다. 이후 단기간의 에디슨 전화사 근무를 제외하고는 직업을 가진 일이 없었다. 런던의 예술가들과 사귀어 각 신문에 원고를 썼으나 수입이 적어 양친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1879년부터 83년에 걸쳐 5편의 소설을 썼으나 모두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고 그 가운데 4편은 친구의 잡지에 게재되었다.
 
1882년 9월, [[헨리 조지]]의 연설을 듣고서 쇼는 [[사회주의]]로 나아갔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크게 감동받아 마르크스 연구를 비롯, [[1884년]] 창설 직후였던 온건 [[좌파]] 단체 [[페이비언 협회]]를 협회에 참가하여 많은 사회사상가와 사귄다. 그 가운데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딸 [[에레아놀 마르크스]]도 있었다.
 
=== 비평가로서의 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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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로서의 쇼 ===
 
그는 스스로도 많은 극을 써서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풍자와 기지로 가득 찬 신랄한 작품을 쓰기로 유명하다.
 
쇼가 극작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다. 1885년부터 쓰기 시작했던 최초의 희곡 <홀아비의 집>은 1892년까지 완성되었으며 런던의 로열티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이어 입센 스타일의 새로운 여성을 다룬 <사랑을 섭렵하는 사람>(1893), 근대 매춘기업을 폭로한 <워렌 부인의 직업>(1893)은 모두 극장측에서 상연이 거부되었으나 1894년에 상연된 <무기와 사람>으로 쇼는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 뒤 <캔디다>(1894), <운명의 사람>(1895), <악마의 제자>(1897),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898), <인간과 초인>(1903) 등으로 쇼는 세계적인 유행작가가 된다. 그러나 예술적으로는 이러한 전기의 작품보다 후기의 <하트브레이크 하우스>(1913-16)나 <성녀 존(Saint Joan)>(1923)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쇼의 인물은 거의가 작가의 대변자이며 그 작품은 자기 사상을 진술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비난, 혹은 그와 반대로 쇼는 단순한 감상적인 오락작가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적지 않다. 그러나 표면적 사상선전극 및 오락극 내부에 깃들인 참된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쇼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바버러 소령>(1905)이나 <하트브레이크 하우스>가 지니는 독자적인 희극성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확실히 그가 말했듯이 우선 그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야 할는지 모른다.
 
{{인용문2|"(나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나의 전작품을 적어도 2회 이상은 읽고 그것을 10년 동안 계속해달라"|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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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세계대백과}}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