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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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 제도와, 세금 제도, 중앙 정부 체제가 갖추어졌다.
 
바빌로니아가 일어난 뒤고 대대적인 문예 부흥이 일어났다. 이 첫 번째 바빌론 왕조의 가장 큰 업적은
법전의 편찬이다. [[엘람]]인을 추방하고 왕국이 정착한뒤 [[함무라비]]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으로 불린다. 함무라비 법전의 사본이 [[수사 (메소포타미아)|수사]](Susa)에서 1901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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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의 뒤를 이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585년]]에 [[페니키아]]를 정복하는 등, 다시 한 번 [[바빌론]]을 문명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ref>World Wide School, History of Phoenicia - Part IV,[http://www.worldwideschool.org/library/books/hst/ancient/HistoryofPhoenicia/chap22.html]</ref>
그의 연대기는 [[기원전 567년]] 이집트 공략 등 일부만이 발견되었다.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u-na'id'')와, [[키로스]](Cyrus)에 의한 바빌로니아 정복에 대해서는 많은 사료가 존재한다. 이것은 주로 나보니두스의 연대기를 기록한 석판과, ''하란''의 달의 신전 복원에 관련된 석판, 키루스의 선전포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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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는 10월(''Marchesvan'') 3일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고브리야스(Gobryas)가 그를 대신하다가,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다. 며칠 뒤 나보니두스의 아들이 죽었을 때 6일 동안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키루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가 무덤까지 그를 따랐다.
 
키루스의 바빌로니아 공격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내부의 분열과 [[유대인]]과 같이 억류되었던 외부 세력에 의해 쉽게 이루어졌다. 키루스가 처음으로 한 일은,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그의 선언문을 통해 명문화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바빌로니아 왕으로서 권위를 인정받기 원했다.
 
키루스가 죽기 1년 전인 [[기원전 529년]], 그는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에게 왕위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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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빌로니아 달력]]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