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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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은 서약을 개별적으로 작성하였고, 각각의 주장은 다양하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자신이 새롭게 구상한 14개조 평화원칙을 국제 사회에 공표하기를 원했다. 윌슨은 새로운 외교 관계는 사람들 스스로 주권을 갖고 국가간의 협력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합국]]의 승리에 그의 군대가 큰 역할을 했으므로 그에게 대단한 명성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복수심이 커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을 정돈하기를 원했다. 강대국 사이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프랑스]]가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 역시 강대국 [[독일]]을 방치하길 원했다.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는 반대로 [[독일]]의 경제와 정치를 압박하고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독일]]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했다.
 
그들 사이의 타협은 그 누구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했고, 조약은 항상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모든 것은 너무 빠르게 처리되었고 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엉망으로 처리되었다.", "강압적인 이 평화는 새로운 증오를 키울 것이다." 또는 "[[유럽]]의 경제 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논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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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포기 ===
 
조약의 4번째 부분은, 배상자의 신분인 [[독일]]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들은 포기하라고 명령 받았다.
[[연합국]]내부에서도 [[아프리카]] 독일 식민지 근처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식민지 강국들([[대영제국]], [[프랑스]], [[벨기에]], [http://en.wikipedia.org/wiki/Union_of_South_Africa 남아프리카연방])이 [[카메룬]], 독일 동아프리카 식민지(지금의 [[탄자니아]], [[르완다]], [[부룬디]]), 남서아프리카 지역(지금의 [[나미비아]])을 나눠 가졌다. 독일남서아프리카식민지는 [[1914년]]~[[1915년]] 이미 [http://en.wikipedia.org/wiki/Union_of_South_Africa 남아프리카연방]에 의해 군사적으로 정복되었었다. 이에 이어, [[독일]]은 상업적 이익(은행의 식민지 지점들, 관세협정들) 을 포기해야만 했다.
 
== 다른 [[동맹국]]들과의 조약 ==
[[동맹국]]들과의 조약은 패전국 별로 나눠서 서명되었다.
[http://en.wikipedia.org/wiki/Treaty_of_Saint-Germain-en-Laye_(1919) 생제르맹 조약]과 연계된 [[트리아농 조약]]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다음과 같이 분할했다:
* [[오스트리아]]는 [[독일어]]권 인구가 거주하는 토지를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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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마니아]]([[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와 독일계 소수 민족들로 이뤄짐)
** [[이탈리아]](독일어 사용도시 [[볼차노]]와 이탈리아어 사용도시 [[트렌토]], [[트리에스테]])
** [[세르비아]]에 포상하기 위해서, 남쪽 [[슬라브인]]들의 연합국이 만들어짐 :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지막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합쳐졌다.
 
[[파일:Map Europe 1923-en.svg|thumb|center|500px|1923년의 유럽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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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원]]은 [[미국]]이 [[국제 연맹]]에 가입하는 것의 비준을 거부했다. 즉 [[미국 상원]]은 [[미국]]이 [[국제 연맹]]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것은 바로 이 [[국제 연맹]]이란 기구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는 조약으로 이익을 본 중요국가들 중 하나이다.(알자스로렌의 반환, 독일 서부지역의 비무장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할 그리고 재건을 위한 막대한 경제적 지원) 하지만 [[프랑스]]는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영구적인 [[라인 강]] 좌안지역의 지배권을 원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조약 435번 항목은 [[1860년]] 체결된 [[:en:Treaty_of_Turin|토리노 조약]]에서의 영토분할 중 일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435번 항목은 [[:en:Savoy|사부와]]의 영토분할에 관련된 비무장 지대들은 제거했다. [[1932년]] [[프랑스]]는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로부터 토리노 조약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사부와와 [[스위스]]에 《무력을 앞세워》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판결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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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건 ===
재건을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막대한 비용을 부담했다. 심각한 경제적 고충에 부딪히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는 금방 전쟁 보상금을 지불의 불가를 나타냈다. [[연합국]]은 그래서 자연자원을 요구했다. [[독일]]의 자연재화 배달이 늦어지자, [[프랑스]]와 [[벨기에]]는 [[1923년]] [[루르 지방]]을 점령한다. 이것은 또 다시 [[독일]]의 경제를 불안정화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의 감독 아래 [[:en:Dawes_Plan|도스안]]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독일]]이 부담해야 하는 부담금이 역시 너무 높게 설정돼 있었고 이것은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게 만든다. [[1929년]] 완성된 [[:fr:Plan_Young|영안]]이 그것이다. [[독일]]의 부담금은 감소되었고 상환 날짜들도 모두에게 합리적으로 조정되었다. [[독일]]에서는 재건사업이 오랜기간동안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었고 강렬한 복수심을 조장했다. [[1929년]] 정부에 반대하는 한 탄원서가 접수가 되었다. 이 탄원서는 전쟁보상금 지급을 반대하는 법의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투표에 참여율이 매우 낮았고 투표자의 약 95%가 반대하였다.
 
영안에 따르면 전쟁보상금은 [[1988년]]까지 지급된다. 하지만 [[대공황]]과 함께 지급이 중단된다. [[1933년]] [[나치즘|나치]]가 [[독일]] 권력을 잡고 재건에 관한 모든 것을 거부한다. 전쟁보상금 지급이 최종적으로 중단되었고 [[독일 제국]]의 식민 영토들은 [[1990년]] 독립을 한 [[나미비아]]을 제외하고 [[1960년]] 초반 [[아프리카]]인들의 독립 이전까지 유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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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조약''' 원본은 [[프랑스]] 외무부의 문서보존실에 보관되었으나 히틀러의 명령으로 빼앗겨 사라졌다.<ref>http://www.lefigaro.fr/actualite-france/2008/12/20/01016-20081220ARTFIG00214-le-demenagement-polemique-des-archives-du-quai-d-orsay-.php 2008년 12월 20일 피가로</ref>
 
== 주석각주 ==
<references/>
 
== 바깥 고리 ==
* {{언어고리|fr}} [http://www.diploweb.com/ue/husson.htm J. Bainville, J.M. Keynes : 베르사유 조약의 분석] Edouard Husson, 독일전문가
* {{언어고리|fr}} [http://hypo.ge-dip.etat-ge.ch/www/cliotexte/html/traite.de.versailles.html 베르사유조약과 관련된 텍스트들]
* {{언어고리|fr}} [http://www.crdp-reims.fr/memoire/bac/1GM/connaissances/reparations.htm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연표]
* {{언어고리|fr}} [http://www.herodote.net/Textes/tVersailles1919.pdf 베르사유 조약]